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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베팅에 감춰진 '청춘의 비명'

한영일 증권부장

'영끌' 부동산 '몰빵' 주식 '광풍' 코인

2030 야수의 심장 가진 '베팅족' 변신

한탕주의 매몰 투기꾼 몰아세우기 앞서

취업난과 경쟁속 '낙오 불안감' 살펴야

정부·정치권, 입 보다 귀 먼저 열기를





“술은 마셨는데 음주 운전은 아닙니다.”

오래전 음주운전으로 추돌 사고를 일으킨 한 연예인이 한 말이다. 이후 비슷한 유의 수많은 패러디가 넘쳐나기도 했다. 지난주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이 철 지난 유행어에 난데없이 숟가락을 얹었다. 최근 핫 이슈로 떠오른 암호화폐를 놓고 “과세는 하겠지만 자산은 아니다”라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암호화폐는 화폐가 아니어서 투자자를 보호할 수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금융 정책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최근 비이성적 과열 국면으로 치닫는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세다. 청와대 게시판에는 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글이 올라와 며칠 만에 12만 명가량의 동의를 얻어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부동산과 주식에 이어 암호화폐마저 서서히 정치 영역으로 들어서는 듯하다. 지난 4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주식 공매도 문제가 ‘표’로 탈바꿈했듯이 말이다.

비트코인을 앞세운 암호화폐 시장의 최근 흐름은 누가 봐도 비정상이다. 투자자들 역시 바보가 아니다. 몇 시간 만에 수십 퍼센트가 급등락하고 코인 거래액이 하루 20조 원에 달해 코스피 시장보다 많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경제라는 것이 사람들이 많이 믿는 데 가치가 부여된다고 하지만 암호화폐의 이상현상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17세기 유럽을 뒤흔든 튤립 투자 광풍 이후 가장 큰 거품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말이다.

그저 이름이 예쁘다는 이유로 수백만 원을 ‘잡코인’에 선뜻 집어넣는 행위를 단순히 ‘투자’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저 초단기 차익을 노리는 ‘도박’에 나섰을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올해 암호화폐 시장에 새로 뛰어든 270만 명 가운데 60%가 2030세대다. 지난해 ‘영끌’로 집을 사들인 이도, 주식시장의 ‘동학 개미’도 역시 젊은 층이 상당수다. 그야말로 ‘야수의 심장’을 가진 새로운 베팅족(族)의 등장이다.

비트코인 웹사이트에는 아나키스트인 스털링 루한의 선언문이 게시돼 있다. “비트코인은 평화적 무정부주의자와 자유의 촉매제다. 암호화폐는 정부의 권위를 쇠퇴시킬 준비가 돼 있다.”



전 세계 수많은 비트코인 투자자들이 선언문에서처럼 정치적 무정부의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 화폐의 대안으로서 암호화폐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한다는 점에서 루한의 선언문은 유효하다.

특히 취업, 연애, 결혼, 내 집 마련도 힘든 한국 사회의 청춘들에게 암호화폐나 주식 투자는 기성세대가 가진 부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자 계층 이동을 향한 몸부림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암호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암호화폐) 투자자는 보호할 수 없다’고 일갈하는 금융 당국의 수장은 그저 ‘꼰대’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본질의 가치도 없는 ‘듣보잡 코인’에 투자하고 엄청난 레버리지를 일으켜 주식을 사들이는 젊은이들을 물가에서 노는 어린아이 철부지로만 여겨도 될까.

과거 고금리 시절처럼 그나마 아껴서 저축하면 내 집 마련의 꿈은 이룰 수 있었던 시대는 갔다. 데모를 하고 다녀도 졸업하고 나면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밥벌이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던 시절 역시 지나갔다. 나이가 들면 으레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 것도 이제 ‘특별한 일’이 됐다.

어쩌면 청춘들에게 베팅은 변해 버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혹시 나 홀로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 사회의 모습은 뒤로 한 채 그저 투자자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정책 당국은 ‘꼰대 정부’일 수밖에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내년 청와대행 경쟁에서 ‘비트코인 표’를 갖고 싶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입부터 열고 호통 치고 보는 ‘어른이(어른+어린이)’보다는 귀를 먼저 열 줄 아는 진짜 어른이 ‘청심(靑心)’을 잡을 것이다. /hanu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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