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반도체 기술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지난해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 생산 장비 구입을 대폭 늘렸지만 여전히 중국의 구입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제조사들의 반도체 생산 장비 수급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장비 투자 규모마저 밀릴 경우 자칫 첨단 기술 경쟁에서 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5일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장비 매출액은 1026억 달러로 사상 처음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생산능력을 키우면서 전년도 712억 달러 규모였던 반도체 생산 장비 매출액은 1년 만에 44%나 급증했다. 아지트 마노차 SEMI 최고경영자(CEO)는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능력을 공격적으로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은 최근 수년간 반도체 생산 장비 구입에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 2018년 반도체 생산 장비 구입에 131억 1000만 달러를 투자한 후 4년 연속 투자 규모가 매년 증가했다. 지난해는 전년(160억 8000만 달러) 대비 58% 상승한 296억 달러로 2년 연속 장비 구입 1위를 차지했다.
한국 또한 투자 규모를 대폭 늘리고 있지만 돈을 쏟아붓고 있는 중국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모습이다. 한국은 지난해 2020년 160억 8000만 달러 대비 55% 증가한 249억 8000만 달러를 장비 구입에 쓰면서 투자 규모가 대폭 커졌지만 격차는 26억 4000만 달러에서 46억 4000만 달러로 벌어졌다. 여기에 대만(249억 4000만 달러) 또한 만만찮은 투자 규모를 유지하면서 중국·한국·대만의 장비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한국은 2018년 177억 1000만 달러를 쏟아부으며 장비 투자 최전선에 서 있었지만 이듬해 투자 규모가 99억 7000만 달러로 44% 감소한 뒤 중국과 대만에 역전당했다.
이들 세 국가가 장비 투자 규모를 크게 끌어올리면서 일본(78억 달러), 북아메리카(76억 1000만 달러), 유럽(32억 5000만 달러) 등 다른 나라들은 상위 경쟁에서 한발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투자를 대폭 늘린다고 해도 최근에는 반도체 생산 장비 수급난이 겹치면서 제때 장비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장비 생산을 위한 부품 수급난에 주문도 크게 증가하면서 장비 인도까지 걸리는 기간(리드타임)이 10개월 이상 소요되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TSMC·UMC 등 글로벌 제조 업체들은 장비를 한발 빨리 받기 위해 장비 업체에 경영진을 급파하는 등 장비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세 공정의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페터르 베닝크 ASML CEO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관계자들이 접촉해 안정적인 장비 공급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췄어도 장비 조달에 실패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만큼 대규모 투자를 유지하는 것 외에 대안 마련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보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첨단 장비를 국산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기업 외에 정부도 나서서 외교적 지원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