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27일 시장 안정화 조치를 위해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에 나선 것은 코로나19 위기 이후 2년 7개월 만이다. 유동성 공급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RP 매입에 나선 것은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로 인한 자금 경색에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번 대책이 시장에 미칠 영향과 함께 통화정책 상충 가능성,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강화 등 여러 변수를 놓고 입체적으로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돈맥경화’로 기업의 자금난이 심각해질 경우 통화 정책의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단기자금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준금리를 올릴 경우 나타날 금융시장의 부작용과 실물경제에 미칠 연쇄 파장을 서둘러 차단할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당장 다음 달 2~3일(현지 시간) 열리는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이 예정돼 있는 만큼 과감하게 RP 매입 카드를 꺼냈다는 관측이다.
한은은 그러면서도 이번 RP 매입이 기존의 긴축정책 기조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이번 조치가 코로나19 당시 도입했던 ‘무제한 RP 매입’과 같은 대규모 유동성 공급이 아니라 자금 순환을 위한 유동성 조절이라는 것이다. ‘한국판 양적완화’로도 불렸던 무제한 RP 매입 당시에는 고정금리 모집으로 입찰해 응찰 금액 전액을 낙찰했지만 이번에는 복수 금리로 경쟁입찰해 예정된 금액 안에서만 낙찰한다. RP 매입으로 일부 단기자금이 공급되더라도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곧바로 회수하면 추가 유동성 효과가 거의 없다는 설명이다. 금리 발작에 따른 자금난을 조기 수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RP 매입 카드를 빼든 한은이지만 자칫 시장에서 긴축정책 이탈로 받아들여져 환율·물가 급등→외인 자금 이탈 등으로 이어지는 사태도 막아야 한다. 한은이 저신용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을 위한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재가동이나 금융안정특별대출 등의 대책에는 선을 긋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시장의 한 관계자는 “(통화 당국으로서도) 정책 엇박자로 조기 낙마한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의 사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이는 RP 매입 발표 이후 유동성 ‘조절’이라는 점을 한은이 극구 강조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고 말했다.
한은은 일부 대형 증권사를 염두에 두고 이번 RP 매입 제도를 설계했다. 대형 증권사가 중소형 증권사와 경쟁하며 시중에서 자금 조달 경쟁을 하지 말고 한은의 RP 매입을 통해 단기 유동성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한은이 직접 거래할 수 없는 중소형 증권사가 시중에서 원활히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간접 지원인 셈이다.
가뜩이나 연말 연초에는 자금 변동성도 크다. 통화 당국으로서도 정책 실기 비판 속에 뒤늦게 유동성 지원 대책을 쏟아내고 있는 금융 당국과 보조를 맞출 필요성이 있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원은 “한시적 유동성 공급 등 미시적 대응을 통해 시장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정책 시행은 긍정적”이라며 “한은은 계속해서 긴축 기조를 이어나갈 의지도 보여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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