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대 박경태(가명) 씨가 대표적이다. 사기를 당한 박 씨는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희망에 사기꾼들의 제안을 덥석 물었는데 돈을 돌려받기는커녕 본인 역시 사기에 가담하게 됐다.
사연은 이렇다. 박 씨는 지난해 5월 한 마케팅 업체로부터 자신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영화 리뷰를 작성하면 수익을 나눠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속는 셈 치고 리뷰를 올렸는데 5만 원을 실제로 받았다. 그는 업체를 신뢰하게 됐고 이후 투자 제안에 거액을 보냈다. 하지만 이는 사기였다. 사기 조직은 박 씨의 투자를 미끼로 협박하며 ‘통장에 50만 원을 입금할 테니 특정 계좌 10곳에 5만 원씩 송금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돈을 보내고 나서야 이 계좌들이 또 다른 피해자의 것이었고 자신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21일 서울경제신문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보이스피싱 역할별 검거 인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검거된 보이스피싱 피의자 2만 1833명 중 4분의 1에 가까운 5064명은 사기이용계좌의 명의인이었다. 올해도 3월까지 붙잡힌 6218명 중 1523명이 계좌명의인이다.
계좌명의인 중 대부분은 사기 조직에 소속된 범죄자들이 아닌 사기를 당한 피해자였다. 사기 조직은 피해자를 포섭하는 단계에서 실제 소액을 송금하며 신뢰를 쌓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 사기당한 피해자들을 겁박해 이들의 통장을 대포통장처럼 사용한다. 피해자들은 미심쩍지만 따르지 않으면 피해 금액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걱정에 돈을 송금하는데 송금하는 순간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가해자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최근 수사기관의 단속이 까다로워지며 대포통장 개설 단가가 높아지자 피해자의 통장을 범행에 이용하는 사기 조직이 늘어나고 있다. 이전까지 모든 송금에 대포통장을 이용했던 사기 조직은 이제는 수천만 원 이상의 큰 금액만 대포통장으로 받고 소액 입출금은 피해자의 계좌를 사용한다. 대포통장 개설 비용을 아끼며 수사기관의 추적을 교묘히 피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일반 시민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알바몬이나 알바천국 등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에 정상적인 업무인 것처럼 가장해 인력을 구한 뒤 그들에게 보이스피싱 업무를 맡기는 것이다. 인천의 한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20대 김하나(가명) 씨는 콜센터 직원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 지원해 소액 결제를 유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입비를 명목으로 피해자들에게 5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의 소액을 받은 뒤 다른 직원에게 고객을 넘긴 탓에 김 씨는 자신의 행동이 범죄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김 씨는 “회사가 정식 업체로 등록돼 있었던 데다 직원들도 많고 급여 체계나 복지제도도 마련돼 있어서 별다른 의심을 하지 못했다”며 “이후 사기 조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회사 측에서 ‘퇴사를 하면 성과급을 모두 돌려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은 탓에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피해자 혹은 일반 시민이 가해자가 되면 금전적 피해는 물론 심리적 타격도 강하게 받는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박 씨는 “가해자를 누구보다 증오하고 원망하는 내 자신이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가해자가 됐다는 사실에 한동안 괴로워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 씨 역시 “뜻하지 않게 경찰 수사를 수개월간 받으면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쳤다”며 “그동안 콜센터 직무만 담당해왔는데 지금은 그 어떤 회사도 믿기 어려워 구직도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관계자는 “거액의 투자금을 잃을 위기에 놓인 피해자들이 사기 조직의 손에 좌지우지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기 행각에 가담하는 사례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며 “피해를 입었더라도 가해 조직이 요구하는 송금 등의 행위는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개인 통장이 대포통장화되면 신용등급 하락 등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으며 범행에 일부 가담했다고 인정될 수 있기 때문에 경찰 조사도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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