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여행이나 입학식,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진을 찍을 일도 거의 없었다. 사진 촬영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행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카메라는 더 이상 사치품도 귀중품도 아니다.
디지털카메라 한 대쯤 보유하지 않은 가정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생활필수품이 됐다. 하지만 카메라가 무려 3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문명의 이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근대정신의 상징
영화는 21세기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이다. 매년 전 세계에서는 5,000 여 편에 달하는 영화가 제작되고 있고, 주말이면 극장가마다 영화를 보려는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처럼 현대인들의 문화 욕구 충족의 선봉장 역할을 하는 영화는 1890년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필름 카메라이자 영사기이며 인화기이기도 한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하면서 태동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로 촬영한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라는 영상을 상영한 것이 바로 영화의 효시다.
그런데 시네마토그래프가 발명되기 전, 다시 말해 영화가 나타나기 이전인 근대에도 영상기기가 존재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사실이다. 유럽에서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 말까지 300여 년의 시간 동안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다양한 시각기구와 영상기구들이 개발됐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림상자(peep box)와 마술환등 (magic lantern)이다.
사실 이 같은 시각기구, 영상기구들은 단순히 무언가를 보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를 넘어 근대정신을 내포하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세상을 종교적 해석에 의존해 바라봤다면 르네상스 이후에는 인간의 직접적 관찰과 측량에 기반을 둔 과학적 사고가 부각됐는데, 그림상자와 마술환등이 바로 이 정신을 실현하는 매개체가 됐기 때문이다.
먼저 그림상자는 '들여다보는 상자'라는 영문 명칭 그대로 작은 구멍을 통해 나무상자 속의 그림을 관람하는 기구다. 상자 전면의 작은 구멍에 확대경을 부착하고, 상자 속 뒷면에 그림을 놓은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림 앞에 소량의 빛을 비추어 그림을 밝게 볼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어두운 상자 속의 그림을 다소 확대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림상자는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시각적 오락기구로 성행하다가 19세기 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시아의 경우 1780 년대 이후 중국과 일본에 유입됐고, 이보다는 늦었지만 우리나라에도 그림상자가 전해졌다. 주로 일제 강점기 때 성행했으며, 1970년대까지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40대 이상이라면 어릴 적 이를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볼거리가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이렇듯 정지된 이미지를 보는 것에 누구도 흥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림상자는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기함을 제공하며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근대사회의 신기한 볼거리
그림상자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한 상태다. 하지만 기원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금은 세공업자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1420년경 작은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그림판을 제작했고 원근법의 기초를 정립한 L.B. 알베르티는 뒤에서 비추어보는 유리 그림판을 그렸던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이론적인 언급은 1677년 독일의 수학자 요한 크리스토프 콜한스의 저서 '새로 발명된 수학적·시각적 진기품들'에서 발견된다.
이 책에서 콜한스는 렌즈와 거울이 부착된 관람기구를 언급했다. 17세기 후반의 초기 그림상자는 길고 큰 상자 모양이었는데, 점차 크기가 작아지며 직육면체 모양으로 바뀌었다. 특히 그림상자 자체가 원근법이 지배하던 시기의 기구였던 만큼 기다란 상자 내부는 주로 원근법 무대와 유사한 구조로 제작됐고, 그림상자 속 그림들도 원근법에 의해 그려졌다.
시각기구라기보다는 오락기구로 인식됐던 탓에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아예 그림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이미지 장사꾼도 등장한다. 쇼맨(showman)으로 불리던 이들은 1790년대 중엽 그림상자가 소형화된 이후까지 장터나 축제 같은 대중이 모이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돈벌이를 했다. 이때 쇼맨들은 줄을 이용해 상자 속의 그림을 교체하거나 그림과 관련된 얘기와 악기연주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당시의 그림들은 이국적인 풍경에서부터 대형 건축물, 화산폭발, 전쟁, 화재, 고대 희곡의 한 장면, 궁정의식 등 흥미를 끌 수 있는 것들로 채워졌다. 여기에는 외설적 그림들도 있었다. 즉 이 시대의 그림상자는 단순한 눈요기 거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과 음악이 곁들여진 시청각 교재였으며,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식과 풍물을 전해주는 지식전달의 매체였던 셈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상자의 그림은 풍경이 낮에서 밤으로 바뀌거나 평온한 도시가 화재에 휩싸이는 등 두 장의 이미지를 활용,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형태로 진화하며 흥미를 높이게 된다. 이는 얇은 종이의 앞뒤에 각각 그림을 그려서 조건에 따라 다른 형상이 보이도록 하는 전환기법의 하나로 관람자들을 그림의 세계에 몰입케 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영화의 선조, 마술환등
그림상자는 1760~1850년대 사이에 대중적 인기가 절정에 달한다. 그만큼 그림상자에 사용할 그림의 수요가 늘어난 것은 당연지사. 이 그림들은 주로 독일의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베를린, 파리, 런던, 옥스퍼드 등지에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최대 생산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마르틴 엥겔브레히트. 이미 1730년대부터 수백 명에 이르는 수공업자들과 함께 원근법에 기초해 무대장면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을 제작, 유럽 전역에 판매한 것. 지금의 영상문화산업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림상자로 인해 하나의 시각문화산업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대개 5~8장을 한 세트로 구성해 그림을 판매했고, 소재는 종교적인 것을 탈피해 일상생활의 모습과 사회적 사건들로 구성해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의 그림 크기가 28×40cm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놀랍게도 요즘의 필름이나 TV, 컴퓨터 모니터의 3:4 비율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림상자는 1850년대 이후 90년 동안의 전성기를 뒤로한 채 점차 무대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각각 1820년대 이후와 1840년대 이후 인기를 끌었던 마술환등, 그리고 사진 및 파노라마 같이 새로 출현한 시각매체들과의 경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림상자는 유럽에서도 과학박물관, 또는 영상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역사 속의 산물이 됐다.
그림상자가 물러난 자리를 꿰어 찬 주인공은 마술환등이었다. 확대경을 사용해 확대시킨 이미지를 벽에 투영한다는 점이 그림상자와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마술환등은 18~19세기에 널리 성행했다. 특히 19세기에는 각지를 유랑하는 환등술사들로 인해 신분의 귀천이나 성별, 연령을 막론하고 다수 대중이 즐기는 영상매체로써 여러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세기 말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등장한 후에도 마술환등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1910~1920년대까지 명맥을 이어갔음을 보면 마술환등의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술환등은 기구 내부에 광원을 놓고, 기구 바깥의 볼록렌즈 앞에 유리 슬라이드 그림을 거꾸로 비춰 이미지를 보여줬다. 그림을 거꾸로 비추는 이유는 이렇게 해야만 벽면(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가 재(再) 역전돼 똑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인공적 이미지를 인공 광원을 통해 스크린에 투영시켜 보는 것을 '마술'처럼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장치를 마술환등 또는 마법의 등으로 불렀으며, 마술환등이 만들어낸 영상도 마술 이미지라고 지칭됐다.
초기에 광원은 촛불을 사용했지만 1760년대 이후 기름불과 석회로 바뀌었다가 19세기 말 전기가 발명되면서 전구로 대체됐다. 이 같은 전기 마술환등은 원리 면에서 슬라이드 환등기나 영화 영사기와 동일하다. 실제 전기 마술환등이 나온 이후부터 영화 영사기가 본격 발전됐다는 점에서 마술환등은 영화의 직접적인 선조로 여겨진다.
마술환등과 공포
마술환등 역시 그림상자처럼 최초 기록은 분명치 않다. 단지 마술환 등은 17세기 후반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과 맥을 같이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일례로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후이겐스는 이미 1659년경 마술환등의 원리를 인지했으며, 벽에 투영 실험을 하기 위해 '죽음의 춤'이란 이미지들을 그렸다.
또한 덴마크의 수학자 토마스 발겐스텐은 처음으로 마술환등을 제작해 1665년 리용 전시회에 선보였고, 이후 코펜하겐· 파리·로마에서 마술환등 공연을 가졌다. 독일의 사제이자 과학자인 아타나지우스 키르허의 경우 1671년의 저서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예술'에서 마술환등의 원리를 처음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마술환등 공연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정확한 시점은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대략 1790년대로 접어들면서 귀신과 유령을 소재로 한 공연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환등술사들이 환등기와 슬라이드를 들고 유랑하며 대중들을 상대로 무섭고, 괴기스러우며, 신비로운 영상에 간단한 이야기와 효과음을 곁들여 시청각적 효과를 가미했다. 이렇게 마술환등 공연은 1800년을 지나며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선구적 환등술사로는 독일의 물리학자 파울 드 필립스탈과 벨기에의 에틴 가스파르 로버트슨을 들 수 있다. 필립스탈은 1793년 파리에서 유령 쇼를 하며 마법사로 이름을 얻은 뒤 1801년부터 1803년 영국에서 마술적 공연을 퍼뜨렸다.
로버트슨은 1797년 이후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파리를 주 무대로 삼았다. 성당이나 수도원의 지하묘지 등에서 연기까지 피워가며 공중에 떠다니는 유령과 귀신을 출현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같이 마술환등 영상의 초기 소재는 귀신을 비롯해 미신, 괴담 등 공포심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스토리가 주를 이뤘다. 환등술사들도 주제에 맞춰 공연 중 갑자기 유령의 환영을 투영한다거나 해골을 등장시킴으로써 관객을 겁주는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렇게 마술환등은 실재하지 않은 가상의 영상물을 바라보며 즐기는 20세기 영상문화의 전조적 형태를 띠었다.
마술환등이 확산되면서 1810년 이후 소재들도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아동들을 위한 동화와 우화가 나타났고, 화산폭발이나 지진 등의 재난물도 생겼다.
또한 성경의 내용을 포함한 종교적 이야기, 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 등도 있었다. 이에 따라 공연장도 사회기관, 가정, 교회 등 여러 공간이 활용됐다.
특히 교회에서는 종교 교육을 위해 마술환등을 활용했고, 정치· 사회단체들도 마술환등을 이용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1870년대 이후의 마술환등은 사람들에게 자연과 세상에 관한 실제적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며 근대 인간의 계몽과정에 기여했다.
오락적 성격에 머물렀던 마술환등에 비로소 교육적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술환등으로 보게 되는 세상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시계(視界)의 확장을 의미했고, 먼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욕망을 자극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마술환등의 영사방법이 더욱 발전해 1~2분 정도의 짤막한 동영상을 상영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됐다. 마술환등 기구 자체도 쌍안, 혹은 삼안 렌즈가 채용돼 좀 더 긴 동영상을 보고자 하는 세인들의 욕망에 부응했다. 이를 보면 영화와 더불어 영상문화가 시작됐다거나 영화가 동영상의 시발점이라는 생각이 무조건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동양에도 18~19세기 때 마술환등이 있었을까. 19세기의 일본에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마술환등과 유사한 나무 상자를 통해 벽에 영상을 투영하는 기구가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그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20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제 강점시대 때 그림상자와 함께 마술환등이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글_이상면 한양대 미디어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zenit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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