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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전의 19세기 영상문화

영상의 과학적 발전(3)

지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카메라와 캠코더는 일반인들에게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카메라 자체가 없는 가정이 적지 않았고, 캠코더는 마치 부(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여행이나 입학식,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진을 찍을 일도 거의 없었다. 사진 촬영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행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카메라와 캠코더는 더 이상 사치품도 귀중품도 아니다.

디지털카메라 한 대쯤 보유하지 않은 가정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생활필수품이 됐다. 하지만 카메라가 무려 3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영상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대인에게 있어 동영상은 생활의 일부가 됐다. TV, 영화관, 휴대폰, 컴퓨터 등 어디를 봐도 동영상이 눈에 띈다. 특히 최근에는 개인들이 캠코더나 웹캠을 통해 직접 만든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 동영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 누리꾼들이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동영상이 단순한 보고 즐기는 오락의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매개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를 보면 동영상이 없는 현대사회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이렇듯 어느덧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버린 동영상은 과연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최초의 동영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정지된 이미지가 동영상으로 변신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다. 18~19세기에 마술환등 등을 통해 영상의 묘미를 일부 맛보았던 사람들이 좀더 긴 영상, 그중에서도 움직이는 영상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감각은 매우 빠른 반면 쉽게 식상해하는 속성이 있어 계속해서 새로운 소재를 찾았고 영상의 길이도 2~3분 이상을 원했던 것.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원리들을 연구·발표했다. 또한 이를 토대로 동영상 시각기구들이 속속 출현했다. 1880년대 이후에는 연속적인 동작을 촬영할 수 있는 영화 카메라가 발명되며 영사기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잔상효과와 동영상의 태동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눈의 '잔상 효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다. 잔상 효과는 우리 눈이 일련의 정지된 이미지를 연속해서 고속으로 보았을 때 마치 하나의 움직이는 영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현재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초당 24장의 정지된 이미지를 보여주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현해내는 잔상 효과의 결실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즉 동영상은 실제로 움직임 자체를 보여주지 않고도 잔상 효과로 이룰 수 있음을 인지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잔상 효과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먼저 18세기 후반 독일의 과학자 제그너와 프랑스의 과학자 다르시는 회전하는 원판에 석탄을 올려놓는 실험을 통해 잔상효과를 입증해냈다. 1765년경 이들이 계산한 잔상의 지속시간은 0.13초 (7.6분의 1초)였다. 이보다 60년여년이 지난 1824년에는 영국인 의사 로제가 마차 바퀴살의 회전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잔상효과가 0.063초(16분의 1초)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 무렵부터 과학자들은 일반인들에게 잔상의 원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한 시각기구들을 완구로 만들어냈다. 그 처음은 1825년 영국의 의사 패리스가 제작한 소마트로프(Thaumatrope)다.

소마트로프는 '요술 회전'이라는 뜻으로서 양면에 다른 그림이 그려진 원형 그림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재빨리 회전시키면 앞면과 뒷면의 그림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 일례로 앞면에는 새, 뒷면에는 새장의 그림을 그려놓고 회전시키면 새가 새장에 속에 들어있는 이미지가 보이는 것이다.

영국의 물리학자이나 화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는 두 개의 톱니바퀴형 원판을 겹쳐놓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시키며 잔상효과를 관찰했다. 이렇게 하면 뒷면의 원판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데 앞면의 원판 틈새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들이 움직이는 듯 느껴졌다.

이후 1832년 벨기에의 물리학자 조셉 플라토와 오스트리아의 기하학자 지몬 슈탐퍼는 패러데이의 연구를 조금 발전시킨 '회전 원판'을 개발했다. 이는 뒷면 원판의 가장 자리에 8~10개의 다른 이미지를 그려놓고 회전시킨 뒤 앞면 원판의 틈새로 들여다보는 장치로 뒷면의 이미지들이 동영상처럼 표현됐다.

플라토는 이를 페나키스토스코프 (Phenakistoscope)라고 불렀고 슈탐퍼는 스트로보스코프(Stroboscope)라고 명명했다. 이 회전 원판은 1833년부터 상품화가 이뤄졌는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움직임을 연속적인 동작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동영상 기구의 진정한 효시라 볼 수 있다.

1년 뒤인 1834년에는 영국의 수학자 호너가 조에트로프(Zoetrope)라는 또다른 동영상 기기를 개발했다. 이 기기는 구멍이 뚫린 검은 원통 속에 연속된 동작들을 그린 그림 띠를 넣고 회전시키는 장치로서 각 그림들이 연결된 영상으로 보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회전 원판과 회전 원통에서 모두 동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각 이미지들 사이에 일정한 차단막, 즉 검은색의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잔상효과를 지속하려면 이미지를 볼 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미지 간의 차단이 있어야 함을 말해준다.







사진술과 필름의 발달

조에트로프의 개발 이후에도 시각기구는 비약적 발전을 거듭해 프랑스의 에밀레노 교수는 1977년 조에트로프의 원통 중앙에 반사 거울을 부착, 원통이 회전할 때 원통 외부에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를 만들었다.

'활동성을 보는 것'이라는 뜻의 이 거울 반사식 회전원통은 1887년~1888년경 마술환등의 영사기능이 추가로 접목돼 벽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영, 다수의 관람이 가능한 방식으로 개선되기도 했다.

또한 레노 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형 렌즈와 거울을 이용, 확대된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영하는 극장 상영식 프락시노스코프를 개발했으며 이를 '시각 연극(Theatre optique)'이라 명명하고 1892년 10월28일부터 파리의 그래뱅 박물관 극장에서 영상물을 상영했다. 이날이 바로 인류 애니메이션 역사의 시작이다. 당시 레노 교수는 3~5분의 동영상에 음악을 곁들여 관객들에게 시청각 영상체험의 기회를 선사했다.



이렇게 동영상 기구들이 발전했던 시기에는 사진술의 발달도 함께 진행됐다. 최초의 사진은 1826년 프랑스의 니엡스에 의해 시도됐는데 그는 카메라 옵스쿠라로 명명된 기기를 이용해 창문 바깥의 지붕 위 풍경을 촬영해냈다.

1830년대 중반 이후 영국의 탈보트와 프랑스의 다게르는 이미지를 종이에 고착시키는 방법에 큰 진전을 거두기도 했다. 특히 다게르는 이를 기반으로 1839년 다게르타입(Daguerreotype)이란 사진술을 제시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카메라를 판매해 사진술 발달에 기여했다.

187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정지된 이미지가 아닌 움직이고 있는 물체를 촬영하는 방법도 개발됐다. 영국의 사진사 이드워드 머이브릿지가 1878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경마장에서 다수의 카메라를 동원해 말이 달리는 모습을 연속 촬영한 것.

그는 처음에는 카메라 12대, 이후에는 카메라 24대를 동원했다. 하지만 촬영된 사진을 연속 동작으로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1대의 카메라로 2초 내에 24장의 사진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카메라의 노출시간 단축이 필요했으며 비로소 고속 셔터의 개발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와 관련 프랑스의 생리학자인 메틴-줄 마레이는 인체와 동물의 운동을 기록하기 위해 동작분해 사진을 연구하던 중 머이브릿지의 성과를 접했다. 그리고 1882년 총을 이용해 이미지를 촬영하는 일명 사진총을 제작했다.

사진총은 장총의 방아쇠를 당기면 필름이 회전하며 12분의 1초에 1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치로 마레이는 이를 사용해 항구에서 날아가는 갈매기의 모습을 연속사진으로 촬영했다.

마레이는 또 이를 발전시켜 유리 원판을 활용해 연속 동작을 촬영하는 크로노포토그라프(Chronophotographe)라는 사진기를 개발했으며 1888년에는 종이 띠 필름을 회전시켜 1초당 60장의 이미지를 촬영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덧붙여 독일의 사진사였던 오토마 안쉬츠는 1884년 고속 관람기(Schnellseher)에 이어 1887년 전기식 고속관람기를 개발하는 등 동작분해 사진을 한차원 더 발전시켰다.

이와 함께 1880년대 초반부터 1890년대 초반에는 필름의 발전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원활한 연속 촬영을 위해서는 기존과 달리 회전이 가능한 롤(roll)형 필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의 조지 이스트만은 1884년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회전형 종이 필름을 개발했다. 이스트만은 1888년 그 유명한 코닥 카메라를 발명하고 이듬해에 70㎜규격의 셀룰로이드 회전필름을 내놓으며 인류 영상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이로써 영화 카메라에서 요구되는 빠른 노출과 필름 이동장치, 회전필름 등 동영상 촬영을 위한 기본 요소들이 갖추어진 것이다.

영사기와 영화의 탄생

동영상 촬영기법의 개발에 따라 필름을 스크린에 투영하는 영사기의 발전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단지 영사기의 경우 빛을 순간적으로 차단시키는 셔터 장치의 기술이 미비해 촬영기보다는 개발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미지를 촬영해 영사를 시도했던 많은 선구자들 중 영국에 거주했던 프랑스 출신의 루이르 프랭스는 1886년~1988년 사이에 16개의 렌즈가 달린 촬영기 겸 영사기를 개발했다. 또한 1989년에는 단일 렌즈로 된 촬영기 겸 영사기를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초당 20프레임의 촬영이 가능한 최초의 영화 카메라다.

영사기의 개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발명가인 에디슨도 참여했다. 1893년 시카고박람회에서 키네토스코프라는 영사기를 선보인 것. 키네토스코프는 동전을 넣고 한 사람씩 동영상을 볼 수 있는 기구로서 1편당 약 30~40초의 영상이 영사됐다.

한편 영국의 로버트 폴은 1895년 3월 미국의 사진기 제작자 버트 에이커스와 함께 35㎜ 필름을 사용하는 영화 카메라를 개발했으며 독일의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도 1892년부터 3년간의 노력 끝에 1895년 7월 비오스코프(Bioscop)라는 영사기의 개발에 성공했다. 비오스코프로는 초당 10프레임을 영사할 수 있어 1편당 20초 정도가 소요되는 10여편의 필름을 상영하려면 약 15분이 필요했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스크린 투영식 영사기인 시네마토그 라프(Cinematograph)가 탄생한다. 이는 마술환등 램프의 빛을 회전하는 셔터를 이용해 극도로 짧은 시간 동안 필름을 노출시키는 장치였다. 이 장치를 통해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의 영화인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직접 촬영했다.

40초 분량의 이 필름은 파리와 리옹, 브뤼셀에서 소수의 사진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상영됐으며 1895년 12월28일에는 프랑스 파리 카푸신가의 그랑 카페에서 이를 포함한 40~50초짜리 필름 10편을 초당 평균 16프레임의 속도로 유료 관객에게 20분간 상영하기도 했다. 이 날은 후일 영화사들로부터 영화의 탄생일로 기록됐다.

이처럼 뤼미에르 형제가 시도한 필름의 상영은 이후 수년간 계속됐고 관객들은 동영상의 실재감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에디슨 역시 곧 바로 다수 관람용 영사기인 바이타스코프(Vitascope)를 개발, 1896년 4월 23일 뉴욕의 극장에서 첫 상영을 가지면서 관객들의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세계 각지에서는 새로운 촬영기와 영사기들이 잇달아 등장하며 현실의 모습과 연출된 장면을 보여주는 필름 비즈니스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활동사진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세계관적 변화를 초래한 수많은 시각기구들 중 하나였다.

사실 영화의 진정한 발명자는 영화사에 쓰여 있는 것처럼 뤼미에르 형제가 아닐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이전에 19세기 후반 여러 선구자들의 실험과 노력에 힘입어 동영상 기구는 발전돼 왔으며, 1895년 말경 뤼미에르 형제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글_이상면 한양대 미디어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zenit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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