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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금융실명제 20년] <상> 실명제 비웃는 차명계좌

비자금… 탈세… 비리 사건 때마다 수천개씩 등장 '불법 온상'<br>"이름 빌려준 사람과 합의하면 합법" 지하경제 차명계좌에 면죄부 준 꼴<br>저축은행 등선 관행화… 조세근간 흔들… 차명계좌 금지 등 근본대책 세워야

모 시중은행의 창구 모습. 차명계좌 개설을 통한 비자금 조성, 불법대출 등의 비리가 이어지면서 금융실명제법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경제 DB


20년 전인 지난 1993년 8월12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극비리에 준비한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다. 이날부터 모든 금융회사와의 거래는 가명이나 차명이 아닌 실명으로 거래해야 한다는 '금융실명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한 것이다. 이 담화로 경제ㆍ금융계는 핵폭탄을 맞은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1960년대 이후 탈세와 비자금 조성 등 온갖 불법행위의 서식처 역할을 했던 가ㆍ차명계좌들이 실명으로 강제 전환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실명으로 전환되면 돈의 실제 소유주가 밝혀져 소득세 등 세금징수가 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금융당국에 포착되지 않았던 지하경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실제 금융실명제는 '개똥이'와 같은 존재하지 않는 허명이나 가짜 이름인 가명이 실명으로 전환됨으로써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원확보에 혁명적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금융실명제법은 사실상 소유주의 이름을 숨기고 남의 이름으로 금융거래를 하는 차명계좌를 허용함으로써 반쪽짜리 법안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년 전 금융실명제 긴급명령 법안 작성 TF팀장이었던 김용진 전 재무부 세제실장은 "금융실명제는 국가의 조세시스템 확립을 위한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며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차명계좌가 여전히 횡행하고 번성함으로써 조세정의와 형평성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실명제는 차명계좌 촉진법(?)=금융실명제의 당초 취지는 실제 돈의 소유주가 자신의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하고 모든 금융거래를 하라는 것이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을 매긴다는 조세의 제1원칙을 세우기 위해서다.

20년 전 금융실명제법을 실시하면서 당국은 경제 충격파가 클 수 있다는 이유로 차명계좌의 실명전환에 두달의 유예기간을 뒀다. 하지만 눈치만 보고 있던 차명계좌 소유주들은 끝끝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다 정부가 이름을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 간의 합의로 만들어진 차명계좌는 합법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려줌으로써 지하경제의 수많은 차명계좌에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됐다.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당시 정부는 차명계좌 수가 전체 계좌의 15%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당시 가명ㆍ허명계좌 비율 추정치인 10%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차명계좌가 합법이라고 공식화함으로써 기존 차명계좌 유지는 물론 탈세, 비자금 조성 등 불법행위를 위한 신규 차명계좌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상황이 됐다. 남의 이름을 빌리는 차명계좌는 대부분 탈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조세정의와 형평성을 갉아먹는 대표적인 수단 중 하나다. 금융 고액자산가들이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해 여러 사람 명의로 금융자산을 분산해놓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많은 국민은 '국가는 잘사는데 국민의 삶은 갈수록 쪼들리는' 주요 원인의 하나로 '불평등한 세금'을 꼽는다. 실제로 통계청의 '2011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공정사회를 위해 개선해야 할 부문으로 '조세(27.8%)'라고 답한 비중이 가장 높았다. '일자리 문제(25.2%)'는 그 다음이었다. 망가진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고 복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줄줄 새는 세금부터 막아야 한다.

◇차명계좌는 온갖 비리의 서식처=차명계좌는 탈세는 기본이고 비자금 조성, 배임ㆍ횡령, 주가조작 등 온갖 불법행위의 진원지다. 수천억원의 추징명령이 떨어진 지 20여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실행에 나선 검찰의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환수작업도 차명계좌 찾기에 다름 아니다. 29만원밖에 없다고 버티는 전 전 대통령은 가족ㆍ측근 등의 명의로 수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은닉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0년 큰 사회 문제가 됐던 저축은행 부실사건도 차명계좌를 이용한 대출비리가 6조원에 달했다고 박민식 의원실이 6일 밝혔다.



차명거래가 합법이다 보니 명의를 빌려주는 사람은 그것이 불법행위인 줄 알면서도 죄의식이 없다. 2010년 신한금융지주 사태의 발단이 된 것도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차명계좌였다.

최근 구속된 이재현 CJ 회장은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 600여개를 만들어 주가조작을 하면서 수백억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2008년 경영권 편법승계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에서 임직원 수천명의 차명계좌로 4조5,000억원대의 차명재산을 관리해온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지난해 횡령ㆍ배임 혐의로 구속된 김승연 한화 회장도 수백개의 임직원 차명계좌를 보유한 사실이 적발되는 등 대기업 오너 비리 수사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차명계좌다. 박영준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주가조작 등 거의 모든 금융비리에는 필연코 차명계좌가 동반된다"며 "만악의 근원이 되는 차명계좌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10년부터 수년간 금융시장 혼란을 부추겼던 저축은행 사태의 중심에는 대주주들의 고질적인 불법대출이 있었고 이는 모두 차명계좌라는 수단을 악용해 진행됐다. 조성목 금감원 국장은 "부실과 불법대출을 감추기 위해 수십개의 차명 대출계좌를 이용하는 것이 저축은행업계에는 관행화돼 있다"며 "차명계좌를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등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세청이 탈세조사를 위해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요청하는 금융거래의 분석행위도 차명계좌 추적을 통한 실제 소유주를 찾아가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차명계좌를 효과적으로 차단한다면 불법행위를 대폭 근절하는 것은 물론 세원확보를 통한 지하거래 양성화를 추진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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