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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스토리] 미두신과 금광왕

1937년 11월 발간된 월간지 '광업시대' 에 실린 '방응모론' . '광업시대'는 이 글에서 방응모를 조선 광업계의 큰 인물로 소개했다.


위문복 하나대투증권 e-Business지원부 부부장

일제 강점기, 대표적 재테크 수단은 주식과 미두(米豆), 금광 투자였다. 이는 부(富) 축적의 지름길이자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각광 받으며 당시 나라 잃은 설움에 희망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던 조선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모 아무개가 투자로 큰 돈을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크게 회자됐고 해당 인물은 성공신화의 주역으로 꼽혔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두신 반복창이다. 반 씨는 12세 나이에 인천 일본인 미주업자 하인으로 들어갔다 2년 뒤 시세를 전달하는 ‘요비코’와 시장대리인인 ‘바다지’ 등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모아둔 본인 전재산인 500원을 미두 시장에 투자, 1년 만에 40만원이라 거금을 손에 쥐면서 단숨에 조선 최고 갑부 반열에 올랐다.

금광왕 방응모도 당시 최고 갑부 가운데 한 명.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방 씨의 경우 40세의 늦은 나이에 폐광을 다시 개발, 3년 만인 1927년 손가락 3개 굵기의 ‘삼지금맥’을 발견하면서 일확천금을 얻었다. 교동광산은 조선 전체 금 생산량이 10%나 늘어날 정도의 엄청난 매장량을 자랑하는 곳. 한 때 광부 수만 1,200명에 달했다. 특히 그는 1932년 교동광업소를 일본의 중외광업에 팔면서 135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다.



이들은 각기 미두와 금 투자로 당시 최고로 회자되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성공적 시작과 달리 결말을 극명히 갈렸다. 박 씨는 무리한 투자가 연거푸 실패하면서 불과 2년 만에 전 재산을 탕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혼에 이어 사기사건에까지 휘말렸다. 또 30세의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려 10년 동안 비참한 삶을 살다 결국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방 씨는 금광 매각으로 얻은 자금으로 당시 누적된 적자로 파산위기에 몰렸던 조선일보를 50만원에 인수하고 이후 사세 확장에 나서면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었다. 1933년 잡지 ‘삼천리’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 씨를“부호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라 평가할 정도였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다.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욕심은 화(禍)를 자초할 수 있다. 한 때 조선을 최고의 갑부로 불리던 박 씨와 방 씨의 운명도 욕심이란 차이로 극명히 갈린 것 아닐까? 증시 역사는 말한다. “성공적 투자에도 출구전략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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