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슈퍼사이클(초호황)이 고점으로 치닫는 사이에도 반도체 장비소재 업체까지는 온기가 전달되지 못했다. 오히려 메모리 반도체 수요 감소의 직격탄은 장비소재 업체들이 먼저 맞고 있다. 이를 두고 정부에서는 “낙수효과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이에 대한 성장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정부 들어 법인세 인상에 이어 공정거래법 강화, 연구개발(R&D) 세액공제 축소가 줄을 잇는 것도 낙수효과가 사라졌으니 세금이라도 많이 내고 R&D 지원도 필요 없다는 논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기업은 여전히 투자·고용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3년 동안 400조원이 넘는 투자는 협력업체 등 2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계획이다. 특히 산업 생태계 변화에서 대기업의 역할은 중요하다. 중소기업들의 자생력이 약한 우리 산업 구조에서 대기업들의 투자와 R&D 결과물이 중소기업으로 흘러가게 해 산업 생태계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분수효과도 낙수로 모은 분수가 있어야 발생한다.
최근 산업 생태계의 변화는 반도체 산업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지난해 3·4분기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의 D램 시장 점유율은 74.6%, 낸드플래시 점유율은 46.4%를 기록했다. 한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절대적이지만 반도체 관련 장비소재 업체들의 경쟁력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10.1%에 불과하다.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도 18.2%에 그쳐 2013년의 25.8%에 비해 오히려 후퇴했다. 반도체 소재 업체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도 10% 남짓에 불과하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국내 반도체 회사들의 기술력과 시장 지배력을 감안하면 한국의 반도체 장비소재 업체들은 최소 네 배 이상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실제 지난해 반도체 초호황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장비소재 업체들은 이 같은 호황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의뢰해 증시에 상장된 반도체 업체 중 컨센서스(추종기관 3곳 이상)가 있는 11개 업체의 지난해 실적을 분석한 결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28.3%로 전년(24.9%) 대비 3.4%포인트 개선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나머지 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은 15.5%에서 16.1%로 0.6%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전 세계 반도체 장비소재 업체들은 초호황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한 예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도 반도체 장비를 공급하는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는 지난해 순매출액이 172억5,000만달러로 전년 대비 18.6% 늘었으며 영업이익은 48억달러로 전년 대비 25% 가까이 증가했다. 국내 반도체 장비소재 업체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다 보니 반도체 경기 호황의 낙수효과가 고스란히 미국과 일본·유럽 업체들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소품종 대량생산인 메모리와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 위주인 파운드리·팹리스 등 비메모리 분야의 경우 중소 업체들이 탄탄하게 받치고 있어야 전반적인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분야에서 대만의 TSMC에 밀리는 것도 대만의 중소 반도체 설계 업체들의 저변과 경쟁력이 탄탄하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 의존도가 높은 자동차 부품 업체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들은 완성차 업체들과 수직계열화를 통해 고성장을 일궈냈지만 이로 인해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는 점이 문제다. 지금과 같이 현대·기아차의 실적이 크게 둔화되는 상황에서는 버틸 만한 체력이 없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부품 업체들의 현재 수출된 부품 중 현대·기아차 공장이 들어선 지역으로의 수출 비중은 71.3%에 달한다. 고용 효과가 큰 조선업도 최근 업황 회복의 효과가 대형 조선 3사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조선업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조선 기자재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지난 5년 사이 조선 기자재 관련 인력은 1만명 가량 줄었다. 일감이 있어도 일할 사람을 못 구해 수주를 포기하는 업체들도 생기고 있으며 대형 조선 3사의 수주 훈풍이 아래로 전달되기 전에 문을 닫는 업체도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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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국의 산업 생태계가 대기업 의존도가 높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보니 지금처럼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문제점이 더 부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소업체들이 독자 생존이 가능하도록 기술력을 키우고 인력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중소기업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어려운 과제들이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R&D 역량을 키우기 위해 지원을 강화하고, 대기업도 기술과 자금 지원을 통해 협력업체 육성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또 대학들도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교육체계 등을 개편해 지원해야 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기가 안 좋을 때 대기업보다 중소협력업체들이 먼저 타격을 입으면서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며 “정부와 대기업·교육기관이 힘을 합쳐 중소협력업체의 경쟁력을 키워 전반적인 산업 생태계의 토대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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