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브랜드 '작명'까지 챙긴 신춘호 농심 회장의 뚝심…라면 왕조 농심의 탄생

故 신춘호 농심회장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따라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한다. 이런 제품이라면 우리의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범국가적인 혼분식 장려운동도 있으니 사업전망도 밝다”.

1965년 고(故)신춘호 농심 회장이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라면 시장에 진출하며 밝힌 포부다. 긍정적인 전망에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농심은 사업 초기만 하더라도 강력한 경쟁자인 삼양라면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농심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 확대에 나섰다.

시장에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농심라면’이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카피가 인기를 끌면서 농심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카피는 당시 최고의 연예인이던 구봉서 곽규석을 등장시켰다.

농심이 라면 시장의 강자로 떠 오른 것은 1980년대 초반부터다. 첫 히트작은 너구리다. 1982년 출시된 너구리는 첫 반응부터 뜨거웠다. 농심 라면의 첫 대표 메뉴가 탄생한 셈이다. 다음해인 1983년 나온 안성탕면은 농심의 라면 제국 건설에 기름을 부었다. 1983년 이전가지 평균 30% 수준에 머물던 농심의 시장 점유율은 안성탕면 인기를 바탕으로 1984년 40.15%를 기록했고 1985년에는 42.%로 뛰어올라 마침내 시장 지배자로 나서게 된다. 이후 농심은 단 한번도 라면 시장에서 1위를 내주지 않았다.



이후 농심은 1986년 농심 최고의 히트작인 ‘신라면’을 출시하면서 1987년 시장 점유율을 46.3%로 끌어올렸고 1988년에 53.8%, 1989년에 58%까지 끌어올렸다.

한편 신라면과 관련해서 신 회장은 “저의 성(姓)을 이용해 라면 팔아보자는 게 아닙니다.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辛’으로 하자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던 일화가 있다. 신 회장이 브랜드 작명에 직접 참여한 것이다. 신 회장이 브랜드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1970년 ‘짜장면’의 실패에서였다. 유명 조리장을 초빙해 요리법을 배우고 7개월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내놓은 국내 최초 짜장라면 ‘짜장면’은 출시 초기 소위 대박이 났다. 하지만 비슷한 이름으로 급조된 미투제품의 낮은 품질에 불만을 느낀 소비자들은 짜장라면 전체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농심의 짜장면도 사라지게 됐다. 당시 신 회장은 “제품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로 확실한 차별화 전략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맛있는 라면 1위’로 꼽힌 신라면 블랙의 탄생도 신 회장의 아이이더에서 나왔다. 신 회장은 2010년 조회사에서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며 프리미엄 라면의 출시를 지시했다. 이에 농심은 2011년 프리미엄라면 신라면블랙을 출시했다. 신라면블랙은 출시 초기 규제와 생산중단의 역경을 딛고, 지난해 뉴욕타임즈가 꼽은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올랐다.

/박형윤 기자 manis@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