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현대차(005380)·롯데 등 대기업들이 계열 벤처캐피털(CVC)을 통해 올해 벤처펀드 투자 규모를 3배가량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오는 30일부터 지주사의 CVC 설립도 허용돼 내년에는 LG·GS·SK 등 10곳가량의 기업집단이 직접 벤처 투자에 나서며 미래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대기업들의 경쟁은 한 층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26일 벤처 투자 업계에 따르면 CVC를 계열사로 둔 삼성·롯데·현대차·코오롱은 올해 5,000억 원의 벤처펀드를 신규 조성했다. CVC는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에 직접 지분 투자를 하는 금융회사다. 지난해 이들 CVC 4곳이 조성한 신규 펀드는 1,652억 원이었는데 1년 만에 3배 가량 늘어난 것이다.
삼성벤처투자가 올해 3개 펀드를 신규 결성하며 1,800억 원을 모아 규모가 가장 컸는데 펀드의 유한책임투자자(LP)는 100% 삼성 계열사다. 삼성이 모든 자금을 조달·운영하는 셈이다. 롯데벤처스는 총 1,202억 원의 벤처펀드를 조성했으며 롯데케미칼(011170)·롯데쇼핑 등이 적극 자금을 투입해 가장 많은 5개 펀드를 결성했다.
현대차의 제로원 역시 올해 신규로 745억 원의 ‘제로원 2호 펀드’ 조성에 나서자 현대차 계열사들이 투자자로 참여했다. 코오롱인베스트먼트 또한 1,215억 원 규모로 ‘코오롱 2021 이노베이션 투자조합’을 결성했다. 삼성·롯데·현대차·코오롱의 CVC는 조달 자금을 인공지능(AI)과 친환경차, 수소, 시스템 반도체 등의 미래 기술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30일부터 일반 지주사가 금융회사 성격의 CVC를 계열사로 둘 수 있게 되면서 대기업의 벤처 투자는 내년부터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GS가 CVC를 내년 1분기 내 설립하는 것을 필두로 LG·SK·효성이 CVC 신규 설립을 적극 검토 중이며 신세계·이랜드 등은 이미 출범한 CVC에 새 펀드 조성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벤처투자의 모태펀드와 한국성장금융·산업은행 등 정책 금융기관이 앞장선 제2 벤처 붐에 삼성·롯데를 중심으로 대기업들도 가세하면서 벤처·스타트업 투자 열풍은 내년에 한층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기업들은 2~3년 전만 해도 청년 창업가들을 지원하는 상생 및 사회 공헌 사업으로 벤처 투자를 바라봤지만 이제는 미래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핵심 채널로 벤처캐피털 설립과 펀드 조성에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 금융회사 성격이 큰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설립이 일반 지주사에도 30일부터 허용돼 대기업들의 벤처 투자는 내년에 더욱 가속화하면서 스타트업들의 성장에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대기업 ‘미래 발전소’될 CVC 내년 10개 안팎 신규 진입=CVC 설립을 서두르고 있는 대표적 기업은 GS그룹의 지주사인 GS다. 최근 CVC 설립 추진을 공식화한 ㈜GS는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업 목적에 이미 금융업을 추가한 바 있다. GS는 빠르면 내년 1월 CVC 설립을 마칠 계획으로 대표이사도 미리 내정했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UBS 출신의 허준녕 부사장으로 하이퍼커넥트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역임했다.
GS 계열사인 GS건설도 별도 CVC 설립을 검토하면서 벤처 투자를 위한 전담팀을 꾸려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건설 사업 이외에 신사업을 발굴하려는 목적으로 GS 오너가 4세가 직접 해당 팀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LG그룹도 CVC 설립을 위한 사전 준비에 나섰다. 올 초부터 홍범식 ㈜LG 경영전략팀장 겸 사장이 직접 국내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을 만나 CVC 설립을 위한 청사진을 그려왔다. 아울러 SK를 비롯해 현대중공업·효성·CJ 등도 지주사 산하에 CVC를 설립하기 위해 내부 인력 충원 및 외부 전문가 영입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세계나 이랜드의 경우 산하에 벤처캐피털 자회사를 설립해놓고 있지만 본격적 투자 활동은 미루고 있는데, 경쟁사들이 내년부터 관련 투자를 확대하면 신규 펀드 조성에 속도를 낼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사업 환경이 광속으로 변화하는데 대기업들은 신규 사업 아이템을 발굴해도 빠르게 적용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사내·외 좋은 사업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사업화하기 위해 벤처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기업들의 보수적이고 느린 의사 결정이 CVC 운영에 약점이 될 수 있어 이를 보완할 장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이미 인력난을 겪고 있는 벤처 투자 업계에서 전문 심사역들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CVC 성공의 열쇠는 투자 전문 인재들을 영입하는 데 있다”면서 “확실한 성과 공유 체계나 독립적 투자 의사 결정 구조가 마련되지 않으면 인력 확보가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현대차·포스코 등 스타트업 육성 직접 나서기도=대기업들은 벤처 투자뿐 아니라 스타트업에 대한 직접 지원 프로그램을 늘리면서 투자 안테나를 높게 세우고 있다.
국내 대기업 최초로 스타트업 발굴·육성 프로그램 ‘아이디어 마켓플레이스’를 2011년부터 운영 중인 포스코는 10년 동안 유망 벤처기업 411개를 선발해 132개사에 215억 원을 투자했다.
현대차도 2018년부터 ‘제로원 액셀러레이터’라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사내 현업 팀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우수한 역량을 가진 스타트업을 발굴해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간 기술 혁신 가능성이 큰 64건의 협업 프로젝트를 추진해 39개 업체에 지분 투자 등을 실제 집행해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삼성은 2018년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C랩 아웃사이드’를 신설해 기존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인 ‘C랩 인사이드’의 참여 자격을 외부 스타트업까지 확대한 바 있다. 롯데도 연 2회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인 ‘엘캠프’를 열고 선발된 스타트업에 자금 지원은 물론 계열사들과 협업 기회도 부여하고 있다.
LG그룹은 2018년부터 스타트업 발굴·지원 프로그램인 ‘LG 커넥트’를 운영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친환경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인 ‘에그’를, SK텔레콤은 정보통신기술(ICT) 스타트업 발굴을 위한 ‘트루 이노베이션 액셀러레이터’를 각각 운영 중이다.
정유신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장은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는 재무적 지원 외에 다양한 사업 기회와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 스타트업들이 초기 단계를 넘어 중견 기업 이상으로 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된다”며 “대기업도 혁신 성장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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