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탈중국보다는 미국의 제조업 부흥 관점에서 바라봐야 진단도, 해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9일 “위기는 늘 기회의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법”이라면서 “한층 격화하고 있는 글로벌 배터리 패권 다툼에서 K배터리가 밀리지 않으려면 현재의 성과에 취해서는 안 된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과의 배터리 동맹이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SK온·삼성SDI(006400) 등 K배터리 3사는 2019년 이후 미국과의 배터리 동맹을 발판으로 북미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2026년까지 완공되는 북미 지역 전기차용 공장의 연 생산캐파(567.5GWh) 중 78.1%가 K배터리가 세운 단독공장 혹은 합작공장에서 생산된다. 연간 887만 대의 전기차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보조금 무기로 K반도체 옥죈 美…배터리도 견제 가능성
문제는 미국 행정부가 반도체 동맹인 우리나라 기업에 ‘자국 우선주의’라는 매서운 발톱을 드러낸 것처럼 한국이 쥐고 있는 배터리 동맹의 주도권도 가져오려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우리 투자 기업의 영업 기밀인 생산 시설 공개와 초과이익 환수 등을 골자로 한 반도체지원법 보조금 지급 기준을 발표하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을 궁지로 내몰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전기차 등 첨단 제조업에서 패권을 잡으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다. 배터리의 경우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과 성능이 검증된 K배터리와 동맹을 맺는 방식을 통해 자국으로 배터리 공장을 빨아들이고 있다. 당장은 한미 배터리 동맹에서 K배터리가 우위에 있지만 배터리 생산 시설을 장악한 미국이 언제든 주도권을 가져오려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K배터리가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인 북미 시장도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완성차 업체들이 합작 관계를 이용해 한국의 배터리 기술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배터리 합작공장을 운영·정비하는 과정에서 민감한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배터리 회사들은 ‘산업 기술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배터리 설계·제조·평가 등 기술 공유를 막고 있다는 입장이다.
유럽판 IRA·일본의 재부상…사방이 K배터리 경쟁자
자체 배터리 산업을 육성하려는 유럽연합(EU)의 행보도 한국의 입지를 좁힐 수 있다. 현재 스웨덴 노스볼트 외에 유럽의 배터리 기업은 전무한 실정이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원자재 확보를 위한 중앙기관인 ‘유럽핵심원자재위원회(가칭)’를 신설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CRMA 초안을 이달 14일(현지 시간) 발표할 계획이다. 신설 기관은 역내에서 최소 10%의 원자재를 생산하고 원자재를 기반으로 필요한 전략물자 수요의 최소 40%가량을 역내에서 자체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U가 CRMA를 발판 삼아 현지 배터리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셈이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원조인 일본이 다시 몸집을 키울 가능성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2030년 배터리 시장점유율 20%를 목표로 하는 ‘2022 축전지산업전략’을 내놓았다. 자국과 글로벌 배터리 연간 생산능력을 각각 150GWh, 600GWh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총 5조 6000억 엔(약 54조 원)의 민관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다. 또 일본은 배터리 시장에서 게임체인저로 평가되는 전고체 배터리를 2030년 이전에 상용화하기 위해 2132억 엔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해외 공장 짓고 가격 인하…위협적인 中 ‘배터리 굴기’
해외 시장에서 굴기하는 중국 배터리 업체도 부담이다. 중국 배터리 업체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전기차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해외에서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유럽에서 부쩍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국 업체는 단연 세계 최대 배터리 회사인 CATL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말부터 독일 에르푸르트 공장을 가동 중이며 헝가리에 73억 유로(약 10조 원)를 투자해 두 번째 유럽 공장을 짓기로 했다. 헝가리 공장이 목표로 하는 생산능력은 연 100GWh로 세계 최대 수준의 생산 기지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 밖에 궈쉬안은 폭스바겐의 독일 배터리 공장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CALB도 포르투갈에 유럽 내 첫 생산 기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AESC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해외 진출이 갈수록 거세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부터 중국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하면서 자국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월 한 달간 중국에서 팔린 전기차 판매량(인도량)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를 포함해 36만 1000대로 전년 동월(38만 5000대) 대비 6.2% 감소했다.
특히 CATL은 배터리 가격을 크게 낮추며 ‘치킨게임’에도 돌입했다. CATL은 3분기부터 3년간 자사 배터리에 들어가는 탄산리튬의 가격을 톤당 20만 위안으로 낮추기로 했다. 현재 탄산리튬 가격은 톤당 32만 위안이다. 이에 따라 핵심 원료의 가격을 낮춤에 따라 배터리 공급 가격은 15%가량 저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탄산리튬은 CATL 등 중국 업계가 주로 생산하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핵심 원료다.
CATL은 전체 배터리 구매의 80% 이상을 자사에 의존하는 기업에만 가격 할인을 제공할 방침이다. 일단 니오 등 중국 토종 기업이 혜택을 받지만 CATL이 향후 글로벌 제조사에도 유사한 전략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전기차 가격을 낮추기 위해 저렴한 LFP 배터리에 관심을 갖는 완성차 제조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테슬라를 시작으로 메르세데스벤츠와 폭스바겐·포드·리비안 등이 LFP 배터리 사용 계획을 밝혔다.
CATL의 배터리 가격 인하는 탄산리튬 가격이 6개월 새 33% 이상 급락하며 가능했다. 주요 광산 업체들이 생산량을 늘린 결과다. 반면 니켈 가격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공급 부족의 여파로 지난해 11월부터 가격이 오르기 시작해 올해 1월 정점을 찍었다. 니켈은 국내 업계의 주력 제품인 니켈·코발트·망간(NCM)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만큼 배터리 원가가 함께 오르며 국내 업계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할 가능성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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