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술을 활용하면 부모가 자녀의 성별을 마음대로 선택해 임신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선택되지 못한 수정란을 폐기해야해 낙태와 다를 바 없다는 윤리적 논란이 문제가 되고 있다. 자칫 우수 유전자만 보유한 슈퍼 아기의 탄생으로 이어져 DNA 차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 상태다.
신에게서 빼앗은 권한
남성과 여성이 결혼해 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보면 어느덧 아이를 갖게 된다. 이렇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부모들이 태아의 건강 다음으로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있다. 바로 아이의 성별이다.
비단 남아선호사상에 빠져 있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각 부모들은 자신의 상황과 선호도에 따라 어떤 이는 남자 아이를, 어떤 이는 여자 아이를 갖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돌부처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 채식을 하고 부부관계를 하면 딸 등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다양한 민간요법(?)들이 몇몇 성공담과 맞물려 많은 부부들 사이에서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자녀에 대한 이러한 개인적 호불호(好不好)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다수 부모들이 다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속설들을 모두 수행한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성별의 아이를 낳게 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남성의 정자 중 Y염색체를 가진 것이 난자에 가장 먼저 도달하면 아들, X염색체를 가진 것이 먼저 도달하면 딸이 되는데 인위적으로 이 결과를 조작할 수가 없는 탓이다. 또한 정액 1㎖에만 최소 수천만마리에서 1억마리 이상의 정자들이 있어 최종 승리자가 누가 될지 예측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때문에 현생인류가 이 땅에 출현한 이래 지난 수 만년간 자녀의 성별 결정은 오직 신(神)의 고유 권한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최근 과학기술을 무기로 인간이 이 권한을 신으로부터 빼앗는데 성공했다. 이 무기의 이름은 ‘착상 전 유전자 진단법(PGD)’이다.
착상 전 유전자 진단
PGD(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는 부부의 난자와 정자를 체외수정(IVF)시켜서 얻은 수정란을 여성의 자궁에 착상하기 전에 미리 유전자 정보를 검사하는 기술이다. 흔히 말하는 시험관 아기에 첨단 유전자 분석기술이 가미된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임신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한번에 여러 개의 수정란을 생산하게 되며 3일 정도 배양하여 배아 세포가 6~10개에 이르렀을 때 1~2개를 떼어내 검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때에는 수정란에서 세포 1~2개를 추출해도 앞으로의 성장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기술이 알려진 것은 지난 90년대 초 미국 세인트존스대학 출신의 생물학자이자 화학자인 마크 휴즈 박사가 세계 최초로 PGD에 의한 임신과 출산에 성공하면서부터다. 물론 휴즈 박사가 PGD를 연구한 근본 목적은 부모가 자녀의 성별을 결정하는 ‘성별 선택 임신(gender selection)’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낭포성 섬유증, 뒤센 근위축증, 선종성 폴립증, 혈우병 등의 난치성 유전질환들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PGD를 개발했다.
휴즈 박사는 “현재 PGD를 활용하면 세포분열을 시작하는 배아 단계에서 약 200여종에 달하는 유전질환 인자의 보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며 “미래에 유전병을 가지게 될 아이와 그렇지 않은 건강한 아이를 정확히 구별, 가장 건강한 수정란을 골라 자궁에 이식함으로서 유전질환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전 세계에서는 난치성 유전병에 걸린 수천명의 사람들이 이 PGD의 힘을 빌려 건강한 2세를 출산한 바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발길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모 TV프로그램에 출연, 엄지공주라는 애칭으로 유명해진 선천성골성형부전증 질환자인 윤선아씨가 지난 3월 PGD로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다시 한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객이 전도되다
이처럼 PGD는 궁극적으로 유전질환의 대물림을 막기 위한 제2세대 IVF 기술이다. 하지만 현재 PGD는 오히려 ‘성별 선택 임신법’의 하나로 세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도 지난 2000년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PGD 시장이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세태에 힘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작년 미국의 PGD 시술자 중 약 20%만이 실질적 유전질환 문제를 갖고 있고 나머지는 사실상 자녀의 성별 선택권을 갖기 위해 PGD를 이용했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이유가 뭘까.
세계PGD학회(PGDIS)의 조 리 심슨 회장은 “PGD는 유전자 검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검사대상 수정란이 Y와 X 중 어떤 염색체를 지니고 있는지, 다시 말해 향후 남자아이가 될지, 여자아이가 될지를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이라며 “유전자 분석 결과이니 만큼 오류의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임신에만 성공한다면 100% 자신이 원하는 성별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기에 특정 성별의 아이를 갖고자하는 부모들에게 PGD는 그야말로 실패 가능성 제로의 꿈의 기술인 셈이다. 또한 유전질환자 부부보다 자녀 성별 선택을 원하는 정상인 부부들이 더 많다는 것도 이 같은 주객전도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와 달리 태아의 성 감별이 불법이 아닌 미국, 영국 등의 국가에서 수년전부터 ‘자녀의 성별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식의 슬로건을 내건 PGD 전문시술기관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예 일부 업체들은 평균 2만 달러를 호가하는 PGD 비용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담을 낮춰주고자 유전질환 검사를 생략한 채 성별만을 확인해 시술해주는 저가형 패키지상품까지 마련해 놓고 있을 정도다.
또다른 방법들...마이크로소트, PGH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입증된 자녀 성별 선택 기술은 오직 PGD 뿐일까. 그건 아니다. PGD의 최대 경쟁자로 마이크로소트(MicroSort)법이 있다.
미국의 GIVF연구소가 개발한 이 기술은 남성의 정자 중에서 Y염색체 또는 X염색체를 가진 것만을 분리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부모가 아들을 원하면 Y염색체, 딸을 원하면 X염색체만을 골라내 자궁내 인공수정(IUI)이나 IVF를 통해 난자와 수정시키는 것. 정자의 선별은 Y염색체 정자가 X염색체 정자보다 DNA를 2.8%가량 적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 형광색소와 레이저를 이용해 분리시킨다. 또한 Y염색체 정자가 X염색체 정자에 비해 좀더 빨리 헤엄(?)을 친다는 점에서 정자의 속도 차이로 둘을 구분하는 ‘에릭슨법’도 종종 사용된다.
애초부터 부모들에게 자녀 성별선택권을 제공하기 위해 탄생한 기술이지만 PGD처럼 100% 장담을 하지 못한다는 게 한계다.
현 기술로는 두 염색체를 완벽히 분리하기 힘들기 때문. 대게 Y염색체 선별 시에는 약 20%, X염색체 선별의 경우 약 10%의 다른 염색체가 섞여 있으며 이로 인해 원치 않은 성별의 자녀를 임신할 수 있다. 대다수 마이크로소트 업체들이 보장하는 성공률은 여아 90%이상, 남아 70~75%다. 이외에도 PGD의 업그레이드 모델인 PGH (Preimplantation Genetic Haplotyping)가 있다. 목적과 메커니즘은 PGD와 동일하다. 단지 유전자 진단 방법에서 좀더 앞선 기술을 사용, 유전질환 검사항목이 최대 6,000종에 달하며 진단 속도도 빠르다.
지난해 11월 영국 런던에서 세계최초로 이 PGH를 통해 낭포성 섬유증 유전자를 가진 부모가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의료목적에서의 우위이지 성별 선택 임신 희망자들에게는 비용만 비쌀 뿐 PGD와 아무 차이가 없다.
슈퍼 베이비의 출현
사실 우리의 부모 세대들이 남아선호사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여아들을 낙태시켰던 근본 원인을 과거의 성별 선택권 박탈에서 찾는다면 PGD, 마이크로소트, PGH 등은 불필요한 낙태를 줄이고 인간의 행복추구권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할 기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PGD는 기본적으로 상당한 윤리적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수정란이 의학적으로 완벽한 상태라도 성별이 부모의 의사에 반한다는 명목으로 폐기 처분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가톨릭 등 종교계에서는 이를 일종의 살인행위로 규정한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된 후 14일 이후부터 생명으로 보는 생명공학계와 달리 이들은 수정이 이루어진 그 순간부터 생명이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PGD도 인간배아 연구와 관련한 윤리적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손에 자녀의 성별 선택권이 완전히 넘겨질 경우 성비불균형이 심화될 개연성도 크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유전자에 의한 태아 선별이 장기적으로 우수 유전자만을 지닌 일명 ‘슈퍼 베이비(super baby)’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 주장한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유전학공공정책센터(GPPC)의 캐시 허드슨 센터장은 “현재 PGD, PGH는 질병의 유전 방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언젠가 신장, 체력, 지능 등 생명과 상관없는 인자들까지 선별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영화 가타카에서 처럼 자연임신으로 낳은 평범한(?) 아이들이 우수한 능력의 슈퍼 베이비들 사이에서 사회적 차별을 받는 ‘DNA 차별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는 것. 실제 지난달 21일 미국 부시대통령은 이 같은 사태에 대비한 ‘유전자 차별 금지법’에 서명하기도 했다.
과연 이 사회적 혼돈을 종식시킬 명쾌한 해답은 없을까. 허드슨 센터장은 “과학과 종교, 과학과 윤리가 상충될 때는 양측 모두를 만족시킬 정답을 찾는 게 매우 어렵다”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미래의 사회적 혼란에 대비, 다각적이고 진지한 논의를 거쳐 합리적인 접점을 찾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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