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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의 잃어버린 항구도시

The Herod’s Lost Port City

유대의 헤롯왕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영아학살로 유명하다. 요부 살로메의 유혹에 넘어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도 심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성서적 해석의 결과물이다. 헤롯왕은 오히려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무역을 촉진하는 등 실리를 중시한 직업 정치인으로서의 흔적이 더 강하다. 지중해에 위치했던 고대 항구도시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도 그의 작품이다. 수중 건축기술이 적용된 세계 최초의 인공 항구도시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는 숱한 영욕을 겪지만 최근의 고고학 연구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신약성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 2년을 보냈던 ‘가이사랴’라고 하는 도시가 나온다. 가이사랴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방문한 최초의 이방도시였으며, 사도 바울이 로마로 보내지기 전 투옥됐던 곳이다. 원래 이름이 카에사리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인 이 곳은 성서시대에 실존했던 유대의 헤롯왕이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자신의 권력도 과시하기 위해 건설한 고대의 항구도시다. 이 항구도시의 지리적 위치는 지중해에 면한 이스라엘의 하이파와 텔아비브 사이. 상당수의 유적이 바다 속에 잠겨 있지만 육지에서 멀지 않고 깊이도 얕아 최근 활발한 고고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헤롯왕에 대한 성서적 해석의 오류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탄생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0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항구도시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신약성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헤롯왕이기 때문이다. 헤롯왕은 BC 74년 현재의 네게브 사막이 있는 지역인 이도메네아에서 태어났다. 성서에서는 에돔으로 불리는 곳이다. 혈통으로 보면 헤롯왕은 유대인이 아니다. 이도메네아 족이다. 하지만 유대인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손자, 즉 에서가 이도메네아 족의 시조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연관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가문이 당대의 초강대국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탓에 불과 25세의 나이로 갈릴레아의 총독에 임명되는 등 일 찍부터 유대의 정치에 관여하게 됐다.

실제 그의 부친 안티파테르 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와 막역했고, 그 역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평생의 친구였다. 그의 가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총애를 받아 로마의 시민권까지 세습 받았다. 물론 그가 그냥 앉아서 유대의 왕이 된 것은 아니다. 계기가 있었다는 얘기다. BC 43년 헤롯의 아버지이자 유대의 정치적 실력자였던 안티파테르가 죽자 현재의 이란 지역에 있던 파르티아 왕국이 BC 40년 유대를 침공한다. 그리고 이 침공에는 유대의 명목상 왕조, 즉 하스 몬 왕조의 후계자인 안티고노스도 참여해 왕조의 부활을 노리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헤롯은 재빨리 로마로 달려간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냄으로써 이 지역의 실질적 통치권을 인정받게 된다. 그는 BC 37년 유대로 돌아와 안티고노스를 이기고 집권, BC 4년 사망할 때까지 40년 넘게 재위하게 된다. 오늘날까지 헤롯왕에 대한 이미지 중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영아학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자 왕좌를 뺏길 것을 우려해 2세 이하의 영아를 모두 죽였다는 신약성서의 기록이 그 같은 이미지 형성의 바탕이 되고 있다. 또한 요부 살로메의 유혹에 넘어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를 심판한 것도 헤롯왕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마디로 헤롯왕은 광기에 찬 악당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는 모두 성서적 해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다. 따라서 왕이라고 해도 로마 총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면 성서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특히 헤롯왕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상태다. 살로메의 유혹에 넘어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를 심판한 것이 헤롯왕이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헤롯왕의 증손녀 격인 살로 메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선물로 준 사람은 헤롯왕이 아닌 그의 아들 헤롯 빌립 왕이다. 사실 헤롯왕은 실리에 밝은, 오늘날로 치면 직업 정치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게 바로 그의 재위 기간 중 행 해졌던 각종 치적이다.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유대의 경제기반을 닦는데 힘썼다. 또한 로마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열심이었다. BC 25년에는 흉년이 들자 세금을 감면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대규모 인공 항구도시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도 헤롯왕의 정치적, 경제적 계산 아래 만들어진 항구도시다. 그에게 있어 지중해를 오가는 무역선은 알토란같은 돈줄이었다. 그리고 로마가 주요 무역 대상국이었던 만큼 해상 무역의 규모는 갈수록 커져갔다. 헤롯왕은 이 지역에 항구도시를 건설, 세금을 징수하면 재력을 더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특히 그는 새로 만들 이 대외무역 창구를 가급적 크고 웅장하게 꾸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 할 수단으로 삼을 생각도 했다.

물론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이름을 본 딴 도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로마의 보호와 감시를 받는 괴뢰 권력이었지만. 헤롯왕이 새로운 항구도시가 들어설 자리로 선택한 곳은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불리던 동네. 이곳에서 북으로 120km 가면 또 다른 항구도시인 시돈이 있고, 남쪽으로 60km 거리에는 자파 항구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 항구 사이에 새로운 항구를 세우면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헤롯왕은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다른 누구도 여기에 항구를 세우려고 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입지조건은 좋지 않았다. 해안선은 마치 칼로 그은 듯 쭉 뻗어 있고, 많은 선박들이 기항할 만한 형태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의 해류는 매우 사나워 많은 선박들이 침몰했다. 하지만 헤롯왕의 야심은 집요했다. 그는 이미 솔로몬 왕의 성전을 재건하고, 마사다 요새에도 멋진 궁전을 세운 인물이다. 항구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세계 최초의 인공 항구도시로 불리는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건설은 BC 22년부터 BC 10년까지 12년에 걸쳐 실시됐는데,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건축사업 중 하나였다. 사나운 해류로부터 선박들을 보호하는 시설을 만들기 위해 헤롯왕은 바다 속에 대형 콘크리트 덩어리를 다량으로 집어넣어 2개의 대형 방파제를 만들었다.

항구 남쪽의 방파제는 길이가 500m 규모였으며, 북쪽 방파제의 길이는 200m에 달했다. 이들 방파제는 너비가 60m나 됐는데, 헤롯왕은 그 위에 석벽을 쌓고 거대한 탑들을 넓은 간격으로 배치했다. 공사에 사용된 석조벽돌 중에는 5.5×1.25×1.25m 크기에 무게 가 18톤이나 나가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벽돌. 이들 중에는 11.5×15×2.4m나 되는 것도 있다.

이런 콘크리트 벽돌은 일단 바다 위에 나무틀을 띄운 다음 그 속에 콘크리트를 부어 가라앉힌 후 수중에서 경화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됐다. 이 항구도시에는 헤롯왕의 궁전과 로마 총독의 공관이 들어서 있어 유대의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섞여 살았는데, 이들 간 다툼은 서기 66년에 발생한 제1차 유대인 반란의 원인중 하나가 된다. 이곳에는 4,000석 규모의 극장, 1만석 규모의 원형경기장, 대중목욕탕, 상가와 관청, 신전, 그리고 인근 저수지로부터 물을 공급 하는 수도교 등이 만들어져 상당히 세련된 도시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극장 무대는 대리석으로 장식됐으며, 무대 뒤편으로는 화려 하게 꾸며진 3층 건물이 돌기둥과 함께 건설됐다. 극장의 서쪽에 있던 왕궁은 바닷가와 맞붙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수영을 하기 위한 풀장도 있었다. U자형으로 건축된 원형경기장은 길이 250m, 폭 50m 규모인 데 승마나 각종 운동경기를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지은 ‘유대 고대사’ 에 구체적인 치수까지 열거되며 기록돼 있다.

특히 요세푸스는 “헤롯은 스트라토의 망대라고 불리는 곳을 발견, 흰 돌로만 도시를 만들었다. 그는 이 도시에 멋진 궁전을 지어 한층 아름답게 꾸몄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세푸스의 이 같은 기록을 전제로 할 경우 항구도시가 너무나 웅장한 나머지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를 믿는 학자들은 별로 없었다.

현재까지 형체 유지하는 콘크리트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방파제는 모두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콘크리트 제조기술은 현대와 비교해도 거의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일반적으로 시멘트(석회)는 모르타르와 콘크리트 등 2가지에 쓰인다. 모르타르는 시멘트와 모래를 혼합한 것으로 벽돌을 접착시키는 접착제 또는 시공이 끝난 벽의 외부에 바르는 마감재로 쓰인다. 반면 콘크리트는 시멘트, 모래, 그리고 자갈을 혼합한 것으로 블록이나 벽 등의 구조재로 쓴다.

이미 BC 25년경 로마의 건축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는 그의 저서 ‘건축술에 대한 10권의 책’에서 모르타르를 만들기 위한 알맞은 모래 사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모르타르용 모래로 포졸라 나를 추천했다. 포졸라나는 당시 로마, 나폴리, 푸테올 등지에서 구 할 수 있었던 화산암성 모래. 포졸라나는 후에 바이올린의 명품으로 꼽히는 스트라디바리의 제조에 사용됐다는 말도 나온다. 어쨌든 비트루비우스는 시멘트와 포졸라나를 1대 3의 비율로 섞은 모르타르는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고, 수중작업을 할 때는 1 대 2의 비율로 섞어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이는 현재 수중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시멘트와 모래의 혼합비율과 같은 것이다. 다만 당시의 콘크리트는 시멘트와 포졸라나에 더해 들어가는 자갈 대신 타일이나 벽돌조각 등 철거된 건물의 잔해를 사용했다는게 조금 다르다. 포졸라나에는 구조물의 강도를 높여주는 혼화재인 알루미나와 실리카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었다.

이는 로마시대의 콘크리트 강도가 다른 어떤 곳의 콘크리트보다 훨씬 높은 핵심적 요인이 된다. 오늘날에도 콘크리트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시멘트에 고로슬래그, 비산회, 실리카 흄 등의 혼화재를 섞고 있다. 또한 당시의 로마 건축계에서는 수중 건축기술이 보편화돼 있었다. 수중 건축을 통해 2개의 대형 방파제를 만든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는 당시 로마의 수중 건축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지난 2005년 콜로라도 대학 사학과의 로버트 호펠더를 비롯한 3명의 연구자들은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에서 수거한 콘크리트 잔해를 조사한 결과 로마 본토의 콘크리트보다 질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는 포졸 라나의 공급부족, 현지 인력의 숙련도 미숙, 그리고 공사현장의 기후 등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했다. 실제 당시에는 건설자재 전용 운반선 대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싣고 로마로 간 배가 그곳에서 포졸라나를 싣고 다시 유대의 공사현장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쉴새 없이 돌아가는 공사현장의 포졸라나 수요를 맞추는데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결국 헤롯왕이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를 건축할 때는 규정량보다 모자라는 포졸라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항구도시의 콘크리트 잔해가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높이 평가 할만하다.

2,000년 동안 지속된 끝없는 영욕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는 건설된 이후 2,000년 동안 숱한 영욕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서기 66년에는 유대인 회당 앞에서 로마인들이 제사를 올린 것이 발단이 돼 이곳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제1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유대인이 승기를 잡기도 했지만 로마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서기 70년 로마는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다. 이때 2,500명의 유대인 포로가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원형경기장으로 끌려와 로마 검투사들과 싸우다 죽는다. 엘리아살 벤 야일을 지도자로 한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사다 요새에 진을 치고 저항을 계속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런데 이 마사다 요새 역시 헤롯왕이 건설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 이다. 해발 450m의 마사다 언덕은 경사가 가파르고 중턱부터 정상 까지는 아예 깎아지른 절벽으로 돼 있어 접근하기가 어렵다. 반면 정상은 엄청나게 넓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정상은 남북의 길이가 600m나 되고 동서의 폭은 250m다. 대충 계산해도 2만평이 훨씬 넘는 넓이다. 그런데 이 넓은 땅이 잘 닦아 놓은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마치 거대한 톱으로 언덕의 중간 부분을 잘라낸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요건은 천혜의 요새로 안성맞춤이다. 이를 간파한 헤롯 왕 역시 유사시에 피신할 곳으로 마사다 언덕을 택한다. 그래서 정상을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싼 후 북쪽 끝 절벽 부분에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3층 구조의 궁전을 짓는다. 특히 물을 얻기 어려운 그곳에 로마식 목욕탕까지 만들고,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막사도 준비했다.

헤롯왕은 정작 그곳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제1차 유대인 반란을 일으킨 세력들에게 천혜의 요새를 제공한 셈이 됐다. 서기 132년에 벌어진 제2차 유대인 반란 역시 실패로 돌아간 이 후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는 로마의 박해를 받고 있던 기독교의 포교 근거지가 된다. 특히 6세기 말엽에는 이 항구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이 건설됐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도시 규모가 50만평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는 부침의 연속이다. 서기 640년 아랍인들 이 이곳을 정복함에 따라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는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인구 대부분이 떠나 아주 작은 해안마을로 전락하게 되는 것. 하지만 해상무역의 발달에 따른 항구도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9세기 무렵 다시 축성이 이루어지고, 특히 십자군 활동으로 인해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중요성은 재차 높아진다. 실제 십자군은 1101년 이 항구도시를 정복해 통치했다. 1187년 살라딘이 이 항구도시를 점령하면서 성벽을 부쉈지만 1228년 제5 차 십자군 원정에서 독일 십자군이 재차 축성을 시작, 1251년 제6 차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완료한다. 1265년에는 이집트가 이곳을 정복한다. 이집트는 적에게 이 항구도시를 뺏길 것을 우려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이후 카에사리아 마리티마는 주변지역의 건축에 필요한 석 재 공급지로 전락하는 등 19세기까지 폐허로 방치돼 왔다.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부활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위해서는 요세푸스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동원할 필요가 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항구에는 선원들이 거주하는 수많은 아치형 건물들이 있었다. 이 아치형 건물 앞에는 넓은 부두가 있어 배를 대고 물건을 하역했다. 이곳은 북풍이 가장 온순하기 때문에 항구의 입구는 북쪽에 건설됐다.

항구 입구에는 양쪽에 3개의 거상이 기둥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항구의 입구 건너편에는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하는, 카이사르를 위한 신전이 건설돼 있었다. 이 신전 안에는 주피터 상에 맞먹을 정도의 거대한 카이사르 상이 놓여 있었다. 헤롯은 건축의 모든 영예를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그의 이름을 본 떠 카에사리아라 고 불렀다.” 이 같은 당대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 의해 완파된 이후 카에사리아 마리티마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실질적 근거가 빈약한 전설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1873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탐사재단에 의해 처음으로 과학적인 조사가 실시된 결과 십자군 성채, 극장, 원형경기장, 수로시설의 존재가 확인됐다. 돌기둥, 석상, 비문 등의 고고학적 발굴도 이루어졌다. 1947년 이래로 부분적인 발굴이 이어져오다가 1959년 이탈리아 조사단에 의해 대대적인 발굴이 실시됐다. 6년간 진행된 이 발굴에서 도시의 성벽과 상부 수로가 발견됐다.

특히 1970년대에는 카에사리아 고대 항구도시 발굴 프로젝트를 통해 요세푸스의 기록이 정확했음을 입증했고, 항구의 크기도 밝혀냈다. 즉 방파제와 접안시설로 둘러싸인 항구의 규모는 18만㎡ 이었으며, 고관을 접대할 때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내부의 작은 항구 넓이도 1만㎡ 달했다. 북부 방파제 잔해에 대한 수중탐사 결과 무게가 50톤이나 되는 돌도 발견됐다.

특히 수중 콘크리트 경화 기법에 쓰인 유럽산 나무틀의 잔해를 발견해 낸 것은 큰 수확이었다. 심지어 당시의 건설 노동자들이 맨몸 자맥질로 잠수해 수중에서 작업한 흔적도 발굴됐다. 1976~1979년 사이의 발굴에서는 지반을 깎아 만든 35×18m 규모의 풀장과 왕궁의 중심부 토대가 나왔다.

헤브루 대학 연구팀은 이것을 헤롯왕의 거대한 왕궁 잔해일 것으로 판단했다. 1991년 에는 원형극장이 발견돼 도시 남쪽 해안에 원형극장이 있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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