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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 과학적 발전

[1] 영상기기의 선조, 카메라 옵스쿠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카메라는 일반인들에게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카메라 자체가 없는 가정이 적지 않았고, 고가의 렌즈 교환식 카메라는 마치 부(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여행이나 입학식,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사진을 찍을 일도 거의 없었다.

사진 촬영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행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카메라는 더 이상 사치품도, 귀중품도 아니다. 디지털카메라 1대쯤 보유하지 않은 가정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생활필수품이 돼 버렸다.

하지만 카메라가 무려 3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문명의 이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카메라를 비롯한 영상의 과학적 발전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디지털 영상문화의 기원

카메라의 조상을 찾아 끊임없이 가계도를 쫓아 올라가면 정점에 무엇이 있을까. 정답은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다. 라틴어로 카메라는 '방', 옵스쿠라는 '어두운'을 의미한다. 즉 카메라 옵스쿠라는 어두운 방, 암실(暗室)을 뜻한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상자에 작은 구멍을 뚫어 이 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상자의 내벽에 상(像)을 맺게 하는 기구다. 보통 이 구멍에 렌즈를 부착함으로서 한층 선명한 상을 얻었는데, 기계적으로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기구라는 점에서 최초의 카메라, 최초의 영상기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카메라가 캠코더, 영화 영사기 등 각종 동영상 장치들의 조상이 되는 만큼 카메라 옵스쿠라는 21세기 디지털 영상문화의 기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 영상기기는 1820년대에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를 이용, 외부 이미지를 찍는 사진술이 시도되기 시작하면서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60년이 지난 1880년대에는 정지된 피사체를 넘어 움직이는 물체를 촬영할 수 있는 영화 카메라가 개발됐으며, 1895년에 이르러 다수의 사진을 연속적으로 붙여 피사체의 움직임을 구현한 영화의 상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비롯한 근대 영상기구나 영상문화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단지 지난 2001년 국내에서 원서로 출판된 영국 출신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명화의 비밀'에 카메라 옵스쿠라라는 단어가 처음 언급돼 있는 정도다.

이 책에서 호크니는 17세기 중반의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를 포함, 근대의 저명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장은 서양미술사에서 오래전 부터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으로서 지금도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외에는 지난 2003년 개봉한 베르메르에 관한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카메라 옵스쿠라가 등장한다. 영화 속 베르메르가 하녀와 함께 카메라 옵스쿠라를 활용, 그림 대상을 관찰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

사실 카메라 옵스쿠라는 망원경과 더불어 르네상스 이후부터 발달한 근대과학의 상징적 기구다. 또한 실질적인 관찰과 증명을 중시하는 근대적 과학정신의 산물이자 근대 시각문화의 선두주자다. 현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시각 우위적 문화의 선도적 기구라는 얘기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란 말도 여기서 비롯됐다.

다시 말해 카메라 옵스쿠라는 중세 유럽을 주도했던 신(神)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세계를 관찰하고자 했던 의지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문 관측에서 미술까지

외부를 향해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이미지를 맺을 수 있다는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는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다. 제자백가 중 한 사람인 묵자(墨子)가 기원전 5세기경 이 같은 현상을 관찰했고, 평면경이나 볼록·오목거울 위에 빛을 모아 상을 고정하는 현상에 관해 기술했던 것.

서양의 경우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카메라 옵스쿠라의 광학적 원리를 이해하고 기록을 남겼다. 당시 그는 큰 나무 밑의 땅에 드리워진 무성한 나뭇잎 그림자 사이로 태양의 일식 모습을 관찰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일명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와 일맥상통하는데, 이후에도 서양에서는 일식 현상의 관찰을 위해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가 처음으로 서술된 것은 11세기 전반기 한 아랍 과학자에 의해서다. 이라크 출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이븐 알 하이탐이 주인공.

그는 서기 1000년경 자신의 저서 '광학서'에서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반대편 벽면에 외부 물체의 이미지를 맺게 한다는 점, 그리고 색은 컬러지만 상하가 뒤바뀐 형상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유럽에서는 또 13세기 후반 영국의 사제 로저 베이컨이 태양을 직접 쳐다보지 않고 일식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건물 벽면에 카메라 옵스쿠라와 원리가 유사한 형태의 기구를 만들었다. 초기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천문관측의 도구로 쓰였던 것.

르네상스 시대에 해당하는 16~17세기에는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한 언급이 좀 더 빈번해진다. 일례로 개기 일식 현상을 연구하던 네덜란드의 천문학자이자 의사인 라이네루스 겜마 프리시우스가 이 같은 관찰방식에 관해 처음으로 도해를 남겼다.

이후 카메라 옵스쿠라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태동했다. 물론 당시까지는 카메라 옵스쿠라가 실제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도적 학자들이 이런 형태의 기구를 실험하고 결과를 남겼을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만물박사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는 1490년경 카메라 옵스쿠라 형태의 기구에 관심을 갖고 인간의 안구처럼 외부의 상이 거꾸로 맺히는 관찰 방식에 대한 메모를 남겼으며, 이 원리의 기구를 '인공 눈'이라 칭했다.

이어 16세기 중엽 나폴리 출신의 물리학자 지오바니 바티스타델라 포르타는 당시 유럽의 베스트셀러 과학서였던 '자연의 마술'에서 암실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하고, 아마추어 화가도 이를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에 베니스 출신의 학자 다니엘 바르바로도 카메라 옵스쿠라가 그림 스케치와 원근법 묘사에 도움이 된다며 처음으로 미술과의 연관성에 대해 기술했다. 또한 렌즈와 거울의 사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론상이었지만 이미 16세기에 카메라 옵스쿠라가 제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이때에는 렌즈가 발달하지 못해 실제 카메라 옵스쿠라 기구가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탄생

카메라 옵스쿠라가 이론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에 데뷔한 것은
1580년대 후반경이다. 나폴리 출신의 물리학자 포르타가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를 응용, 요즘의 영화관과 유사한 현장실험을 펼친 것.

그는 2개의 방을 만든 뒤 앞쪽 방에서 연기자들에게 연기를 하라고 시키고 뒷면 벽에 구멍을 뚫어 이들의 연기가 뒷방의 벽에 실시간으로 비추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뒷방에 사람들을 모아서 이를 관람하게 했다.

이는 매우 획기적 실험임에 틀림없었지만 관람객들이 역전된 이미지를 오랜 시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교황청은 포르타가 요술을 부렸다며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카메라 옵스쿠라가 과학적으로 인정받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

하지만 카메라 옵스쿠라는 17세기에 이르러 독일에서 본격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포르타의 실험을 알고 있었던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1620년경 야외로 들고 나갈 수 있는 이동식 텐트 형태의 카메라 옵스쿠라를 개발한 것.

이 같은 장치에 카메라 옵스쿠라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케플러였다. 이 텐트 형태의 카메라 옵스쿠라는 제법 주목을 끌어서 유럽의 여러 과학자들 사이에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46년에는 독일 가톨릭 예수회의 사제이자 수학자·천문학자인 아타나지우스 키르허가 저서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예술'에서 거대한 카메라 옵스쿠라 상자를 통해 외부의 이미지를 관찰하는 도해를 다소 복잡한 형태로 남겼다.

40여년 뒤인 1685년에는 역시 독일의 가톨릭 사제이자 학자인 요한 차안이 저서 '인공적 눈'에서 거울을 암실 상자 내에 부착시키는 방식으로 거꾸로 된 이미지를 똑바로 볼 수 있는 휴대형 반사식소형 카메라 옵스쿠라를 제시하기도 했다.

바로 이 같은 선구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결국 수년 후부터 렌즈가 부착된 카메라 옵스쿠라들이 속속 제작됐으며, 사람들이 이를 들고 다니면서 손쉽게 자연풍경과 인물을 스케치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게 됐다.

17세기 중반 이후가 되자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를 포함한 유럽의 몇몇 화가들도 카메라 옵스쿠라에 관심을 갖고 스케치할 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사용된 목제 카메라 옵스쿠라들이 현재 남아있지 않기에 이용 사실이 확증되지는 않고 있지만 다양한 정황 증거들에 의해 사용 가능성이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베르메르의 경우 당대의 뛰어난 물리학자로서 카메라 옵수쿠라의 원리를 잘 알고 있고 이를 주변 화가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콘스탄틴 후이겐스와 지인관계에 있었다는 점이 증거로 제시된다.

19세기 접어들어 카메라 옵스쿠라는 한층 개량된 렌즈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럽의 과학자와 화가들 사이에서 널리 이용됐다.

이 같은 카메라 옵스쿠라들은 사진술의 선구자인 니스포 니엡스와 윌리엄 탈보트가 1820~30년대에 최초의 사진촬영을 위해 직접 만든 수제 사진기의 모델이 됐다. 사실 초기의 카메라들은 카메라 옵스쿠라에서 조금 더 진화된 것에 불과했다.

옵스쿠라와 단원 김홍도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카메라 옵스쿠라가 등장한 것은 언제였을까. 2000년 출판된 한국사진사의 저자 최인진에 의하면 조선 후기 정조 시절 실학파들이 북경을 왕래하며 카메라 옵스쿠라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했다고 설명한다.

시기적으로는 1780년대 중반 이후다. 그는 실학파 학자들이 북경에 와있던 유럽의 학식 있는 가톨릭 선교사들과 접촉, 신문물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광학기구의 하나로 카메라 옵스쿠라를 국내에 유입했다고 보고 있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저서에서도 확인되는데, 그의 형인 정약전이 집안에 카메라 옵스쿠라를 설치해 놓고 바깥 자연풍경을 감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유당전서의 칠실관화설과 복암 이기양의 묘지명에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해 실학파 학자인 이기양의 초상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재조명을 받은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가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했다는 추측이 제기된 적도 있다.

지난해 7월 방영된 EBS의 '조선의 프로페셔널, 화인(畵人) 김홍도'라는 다큐프로그램 속에서다. 당시 제작진은 김홍도가 원근법 같은 서양화법을 수용하면서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과연 김홍도는 어떤 그림을 그릴 때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했을까. 이를 사용했을 때 원근법과 명암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이를 확실해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김홍도가 사용한 카메라 옵스쿠라나 관련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과학이 지속적으로 발달했던 근대시기에 동서양의 화가들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곧 예술과 과학기술이 서로 괴리된 분야가 아니며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최근 사회 전반에 불고있는 '예술과 과학의 융합' 분위기도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카메라 옵스쿠라가 필요할까. 디지털 기술이 발달해 있는 요즘 시대에 이런 원시적인 카메라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도 아동과 청소년 혹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상교육에 있어 카메라 옵스쿠라 만큼 영상의 원리를 쉽게 알려줄 수 있는 최적의 도구는 없다.

글_이상면 한양대 미디어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zenit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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