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는 슈퍼사이클(장기 호황)이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2017년의 데자뷔라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삼성전자(005930)가 기회를 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에서는 선두 주자인 대만 TSMC에 투자 규모에서 밀려 추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초격차’ 전략으로 세계 1위를 유지하던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시장점유율이 줄어들어 경쟁사들에 위협을 받는 국면이다. 더구나 조 바이든 대통령 집권을 기점으로 미국이 TSMC, 일본 기업들과 연합해 새로운 반도체 공급망을 구성한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 수감으로 총수 부재인 삼성전자는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도 공장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라 미국의 대중 규제가 강화되면 사업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①파운드리 추격 시급한데 투자에서 밀려=파운드리는 자체 반도체 제품을 출시하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로부터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만들어주는 생산 전문 기업이다. 최근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급증한 주문을 소화하지 못할 만큼 파운드리 업계는 슈퍼사이클의 중심에 있다. 앞서 2019년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며 10년간 133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시장 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세계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18%로 2030 계획을 발표한 2019년 1분기(19.1%)에 비해 오히려 감소했다. 같은 기간 48.1%에서 56%로 점유율을 늘린 1위 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진 것이다.
문제는 삼성전자가 투자 규모에서도 밀려 앞으로 파운드리 사업 역전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TSMC는 올해 초 280억 달러(약 31조 5,000억 원) 투자 계획을 밝힌 데 이어 지난달에는 향후 3년 동안 1,000억 달러(약 112조 6,000억 원)를 더 쏟아붓겠다고 발표했다. 반도체는 산업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앞선 기술을 보유한 업체가 시장점유율과 이익을 독식하는 구조다. 앞으로 삼성전자가 10년 동안 투자할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단기간에 쓰겠다고 한 TSMC의 물량 공세를 고려하면 추격이 쉽지 않은 것이다.
②메모리 반도체 수성도 위태=삼성전자가 세계 1위 자리를 장기간 유지해온 메모리 반도체에서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점도 불안 요소다. 삼성전자는 1993년 D램 시장 1위에 등극한 후 선두를 내준 적이 없다. 그러나 시장 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D램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2016년 46.6%에서 지난해 41.7%로 하락하는 등 최근 1위 수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후발 기업들의 추격이 거센 가운데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삼성전자의 신제품 개발이 경쟁사에 비해 늦어진 결과다.
낸드 플래시 시장에서도 삼성전자의 위기는 확산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3위권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은 지난해 11월 세계 최초로 176단 3차원 낸드 플래시 양산에 성공했다. 낸드는 높게 쌓을수록 용량과 효율이 개선되는 제품인데 당시 삼성전자의 최첨단 제품(128단)에 비해 성능이 좋은 것이어서 삼성 내부에서도 기술 역전에 대한 충격이 컸다. 또한 마이크론의 경우 글로벌 낸드 2위 업체인 일본 키옥시아 인수를 검토하고 있어 몸집을 불리면 2002년부터 낸드 1위를 지켜온 삼성전자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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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리더십 부재에 투자 결정 지연=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리더십이지만 삼성전자는 총수 부재로 상황 반전의 발판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1월 국정 농단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아 수감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반도체 위기론이 확산되자 산업계를 중심으로 이 부회장 사면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지금은 반도체의 위기, 한국 경제의 위기 상황”이라며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반도체 투자와 고용을 통해 한국 경제 반등의 마중물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④점점 강도 높아지는 미국의 중국 반도체 규제=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발 벗고 나설 정도로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힘을 쏟고 있는 미국 정부의 움직임도 삼성전자에 리스크 요인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TSMC를 필두로 한 대만 기업들과 소재·장비에 강점을 갖고 있는 일본 업체들과 연합해 중국을 배제하는 반도체 공급망을 구성하고 있다. 이날 로이터에 따르면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장을 1곳만 지을 계획이었지만 이를 6곳으로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로이터는 이러한 TSMC의 투자 확대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TSMC와 밀월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데 이는 삼성전자에 악재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현재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기술 추격을 억제하기 위해 반도체 미세공정의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를 다른 장비로 확대할 방법을 마련 중이다. 이 경우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기회를 창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경운 기자 clou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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