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흔히 말하는 신약 개발의 성공 확률이다. 수천 개에 이르는 신약 후보 물질에서 유망 물질을 골라내는 탐색, 독성과 효능을 판단하는 동물실험, 안전성과 부작용을 검증하는 임상 1~3상을 거쳐 보건 당국의 상용화 승인을 받기까지의 확률이다.
보통 신약이 탄생하기까지 약 10~15년의 시간과 최소 1조 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유망 약물이 중간에 탈락하고 오직 1개의 신약만 시장에 나온다. 최소 1만 시간, 1조 원 이상의 자금을 투입해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신약 개발 과정을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에 비유하는 이유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과 연구진들이 신약 개발에 도전했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의 벽은 높았다. 비록 신약 개발의 역사가 짧다고 해도 국내 제약 업계 역사가 100여 년이 됐는데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신약은 9개에 불과하다. 특히 FDA의 장벽이 높기로 유명한 항암제 분야에서 국내 신약이 승인받은 것은 유한양행의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뿐이다.
렉라자는 지난해 8월 글로벌 제약사 존슨앤드존슨(J&J)의 항암제와 병용 요법으로 FDA 문턱을 넘었다. 그 여정은 결코 짧지 않았다. 유한양행은 2015년 7월 바이오텍 제노스코가 발굴한 후보 물질을 기술이전 받았다. 이후 J&J의 자회사 얀센과 공동 개발, 그리고 FDA 승인까지 렉라자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렉라자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다. 후보 물질을 발굴한 고종성 제노스코 대표, 임상을 책임진 조병철 연세대 교수(현 다안바이오 대표), 후보 물질의 가치를 알아보고 기술이전 받아 1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사업적 리스크를 감수한 유한양행의 선구안과 집념이 만든 결과물이다.
실제 렉라자의 개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렉라자는 개발 초기 글로벌 시장에서 찬밥 신세였다. 국내에서 개발된 항암 신약이 일부 존재하지만 FDA에서 승인받은 사례가 전무했던 만큼 냉소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안 된다’ ‘너무 늦었다’ ‘하지 말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유한양행 경영진과 연구진은 뚝심으로 버텼다.
2017년에는 중국 제약사로의 기술이전이 무산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실패는 2018년 얀센에 1조 4000억 원에 달하는 기술이전이라는 또 다른 기회로 이어졌다. 얀센과의 공동 개발 파트너십은 렉라자의 글로벌 임상과 상용화에 날개를 달아줬다.
렉라자의 성공 사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최근 국내 업계의 현실 때문이다. 신약 임상 중단, 기술 반환이 잇따르고 만성적인 자금난에 어려움을 겪는 바이오 기업들이 여전히 많다.
잘나가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금난으로 연구개발(R&D)에 전념하기 어려운 환경에 노출돼 있다. 자금 마련을 위해 기술특례상장으로 기업공개(IPO)에 성공해도 어려움은 끝나지 않는다. 상장 이후 3년간 2회 이상 자기자본 대비 법차손(법인세 비용 차감 전 계속사업 손실) 비율이 50%를 초과하면 관리종목에 지정되고 상장폐지 위험에 내몰린다. R&D 기간이 최소 10년 이상인 바이오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현 제도가 발목을 잡는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업계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중국이 무섭다”는 탄식이다.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수많은 실패를 반복하며 성장해 글로벌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있다. 국내 업계는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넘어 공포감을 느낀다고 한다.
정부가 제약·바이오를 반도체를 이어갈 제2의 먹거리로 키우겠다고 강조한 지 오래다. 역대 어느 정부도 원대한 계획만큼 실질적인 실행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는 수사나 구호가 아니라 제약·바이오 산업의 특성을 반영한 제도 개선과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이번에는 정말 달라야 한다. 대통령이 빠른 시간 내에 직접 업계를 만나 어려움을 경청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주기를 바란다. 0.0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제약·바이오 기업과 연구진에 국가가 파격적인 지원으로 힘을 실어주자. 제약·바이오 분야는 다른 산업 분야와는 많이 다르다. 될성부른 떡잎은 국가 주도로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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